전 세계적으로 인공지능(AI)에 대한 주도권 경쟁이 가속화하면서 물리적 인프라 확보가 최대 화두로 떠오른다. 막대한 전력 생산(발전)부터 안정적인 백업(저장), 서버의 발열 통제(냉각)에 이르기까지 AI 데이터센터가 직면한 3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국내 중후장대 산업이 차세대 솔루션을 제시하며 돌파구로 부상하고 있다. 본지는 차세대 전력원인 SMR(소형모듈원전) 생태계부터 ESS(에너지저장장치)와 액침냉각 신사업까지 AI 데이터센터의 한계를 돌파하며 핵심 인프라 솔루션으로 자리 잡은 K-산업의 현주소를 진단한다. <편집자주>
[미디어펜=김동하 기자] 글로벌 빅테크들의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증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이를 뒷받침할 핵심 설비인 전력 백업 및 냉각 시스템 시장이 호황을 맞이할 전망이다. 전기차(EV) 수요 둔화의 파고를 마주한 국내 배터리 업계와 고수익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려는 정유 업계가 AI 인프라 밸류체인에 올라타며 신시장을 개척하는 양상이다.
21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거대언어모델(LLM) 등 생성형 AI 연산을 처리하는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전기를 소모할 뿐만 아니라 전력 끊김이 없는 엄격한 운영 환경을 요구한다. 과부하로 인한 정전 사태를 막고 전력망을 안정화할 대규모 에너지저장장치(ESS)와 무정전 전원장치(UPS)가 필수적인 이유다.
여기에 초고집적 서버의 열을 식히는 차세대 열관리 솔루션까지 맞물리며 국내 배터리와 정유 업계가 글로벌 AI 인프라 병목 현상을 해결할 돌파구로 부상하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들의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증설 경쟁이 늘어나면서 이를 뒷받침할 핵심 설비인 전력 백업 및 냉각 시스템 시장이 호황을 맞이할 전망이다./사진=제미나이
◆ 전기차 둔화 돌파구…AI 데이터센터 ESS 정조준하는 K-배터리
국내 배터리 업계는 최근 전기차 캐즘 장기화로 인한 실적 정체기를 극복하기 위해 AI 데이터센터용 대형 ESS 시장으로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고 있다. 지난 3월 서울에서 열린 인터배터리 2026에서도 확인됐듯, 배터리 제조사들의 시선은 이미 전기차를 넘어 AI 데이터센터 전력망과 로보틱스 등 비(非) 전기차 영역으로 폭넓게 확장되는 추세다.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이는 곳은 삼성SDI다. 최주선 삼성SDI 대표이사 사장은 일찍이 ESS용 배터리를 회사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지목하고 생산라인 전환과 제품 고도화에 속도를 내왔다. 그 핵심 무기는 배터리 셀과 모듈을 하나의 거대한 컨테이너에 일체화한 'SBB(삼성배터리박스)'다. 전력망에 연결만 하면 바로 사용할 수 있어 설치가 간편하고, 직분사 솔루션 등을 적용해 화재 안전성을 극대화한 것이 특징이다. 북미와 유럽 등 대규모 전력망 인프라 교체가 시급한 지역의 데이터센터 프로젝트에서 지속적인 러브콜을 받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은 ESS 시장의 대세로 자리 잡은 'LFP(리튬인산철)' 배터리를 앞세워 판도를 흔들고 있다. 에너지 밀도는 다소 낮지만 가격 경쟁력이 뛰어나고 화재 위험이 적은 LFP 배터리는 공간 제약이 상대적으로 덜한 데이터센터용 대규모 ESS에 최적화된 폼팩터로 꼽힌다.
특히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 애리조나에 대규모 ESS 전용 생산 공장을 구축하는 등 북미 시장을 거점으로 수조 원 규모의 LFP 배터리 공급 계약을 잇달아 체결하며 글로벌 밸류체인을 공격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SK온 역시 인터배터리 등을 통해 ESS용 LFP 모듈을 선보이며 포트폴리오 다변화에 시동을 걸었다. 배터리 3사 모두 전기차 부진을 상쇄할 '캐시카우(현금창출원)'를 AI 데이터센터에서 찾아낸 셈이다.
◆ 서버 발열 40% 잡아라…액침냉각 신시장 캔 K-정유
안정적인 정제마진을 유지하며 체력을 비축한 정유 업계는 고수익 윤활기유 배합 기술을 앞세워 '액침냉각'이라는 새로운 고부가가치 시장을 캐내고 있다.
기존의 데이터센터는 거대한 에어컨 바람으로 서버실 전체의 온도를 낮추는 공랭식에 의존해 왔다. 그러나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 수만 대가 뿜어내는 막대한 열은 더 이상 공랭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한계치에 다다랐다. 냉각에 소모되는 전력이 데이터센터 전체 전력의 40%에 육박할 정도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방법이 서버를 전기가 통하지 않는 특수 용액(냉각 플루이드)에 직접 담가 열을 식히는 액침냉각 기술이다. 이 방식은 공랭식 대비 전력 효율(PUE)을 대폭 개선해 전력 소모를 30~40%가량 줄일 수 있어 데이터센터의 운영 비용(OPEX)을 획기적으로 낮춰준다.
이 냉각 플루이드의 핵심 원료가 바로 정유사들이 오랜 기간 정제해 온 고급 윤활기유다. SK엔무브는 SK텔레콤 등과 손잡고 선제적으로 액침냉각 실증 및 상용화에 성공하며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윤활유 브랜드 '지크(ZIC)'의 배합 기술을 데이터센터 열관리 시스템에 이식해 글로벌 IT 기업들과 동맹을 맺고 열관리 플루이드 시장 주도권을 쥐겠다는 전략이다.
GS칼텍스와 에쓰오일, HD현대오일뱅크 등 국내 주요 정유 4사 역시 잇달아 관련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제품 출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삼성SDS, LG유플러스 등 대형 데이터센터 운영사들에 자체 개발한 액침냉각유를 공급하거나 실증을 진행하며 속도전을 벌이는 양상이다. 전통적인 내연기관 연료유 중심의 사업 구조에서 벗어나, 빅테크의 AI 인프라를 지탱하는 핵심 열관리 파트너사로 비즈니스 모델을 한 단계 격상시켰다.
산업계 관계자는 "전기차와 내연기관 등 모빌리티 중심의 전통적 사업 구조를 넘어 'AI 데이터센터'라는 새로운 거대 수요처를 확보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며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대형 ESS와 발열을 통제하는 액침냉각은 AI 시대의 핵심 병목을 해결하는 열쇠인 만큼 이 신시장을 선점한다면 국내 기업들의 체질 개선이 본격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디어펜=김동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