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조우현 기자]삼성전자가 오랜 진통 끝에 마련한 임금협상 합의안이 도화선이 되면서, 산업계 전반으로 인건비 리스크가 확산되는 모양새다. 당장 이번 달 임금협상에 돌입할 예정인 SK하이닉스부터 삼성전자의 합의안이 최대 변수로 떠올랐다. 지난해 성과급 체계 개편을 완료한 SK하이닉스 노사는 올해 임금인상률과 함께 주택마련자금 지원 등 복지제도 확대를 두고 치열한 공방을 벌일 전망이다.
이외에도 영업이익에 비례한 성과급을 전면에 내건 삼성바이오로직스, 창사 이래 첫 부분파업을 예고한 카카오, 매년 역대급 보상과 정년 연장을 요구하는 현대차 등 업종을 불문하고 주요 대기업 곳곳에서 ‘노조 리스크’가 분출되는 양상이다.
삼성전자가 오랜 진통 끝에 마련한 임금협상 합의안이 재계 기준선을 흔드는 도화선이 되면서, 산업계 전반으로 인건비 리스크가 확산되는 모양새다. 사진은 지난 4월 22일 연수구 삼성바이오로직스 1게이트 정문 앞에서 열린 노조 결의 대회 모습. /사진=미디어펜 박재훈 기자
이는 과거에 이념과 조직의 연대를 중시하며 ‘정치 투쟁’에 매몰됐던 기성 노조가 힘을 잃은 자리에, 철저한 보상을 요구하는 젊은 세대가 전면에 나서면서 시작된 변화다. 이들은 정치색을 빼고 실무적 협상을 표방하고 있지만, 기업의 업황이나 글로벌 위기 상황 속 리스크 공유는 제외한 채 ‘상한선 없는 청구서’를 들이밀며 새로운 경영 리스크로 부상하고 있다는 게 재계의 지적이다.
◆ “삼성 6.2%·대출 5억 원 줬으니 우리도”…이제 SK하이닉스 차례
31일 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 노사의 올해 협상은 임금인상률과 복지제도 확대를 중심으로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SK하이닉스 노조가 최근 임금협상을 마무리한 삼성전자 합의안을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최근 타결된 삼성전자 합의안의 핵심은 6.2% 임금 인상과 반도체 부문 특별경영성과급 제도 신설, 그리고 최대 5억 원 한도(연 1.5% 금리)의 주택안정대출 제도 도입이다. 이에 따라 SK하이닉스 임직원 사이에서도 주택자금대출 확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분위기다.
현재 SK하이닉스가 운영 중인 주택자금대출 금리는 연 1.5%로 삼성전자와 동일하지만, 대출 한도가 1억 원에 그쳤기 때문이다. 임금인상률 역시 삼성전자 수준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에서 논의될 전망이다.
SK하이닉스 노사는 이미 지난해 영업이익의 10%를 재원으로 하는 초과이익분배금(PS)의 상한선(기본급 1000%)을 폐지했고, 생산성격려금(PI)도 영업이익률에 따라 차등 지급하도록 개편했다. 성과급 기준을 대폭 높여놓은 상황에서 추가적인 대규모 복지 비용까지 청구되자, 사측의 비용 부담이 임계점에 달했다는 우려가 나온다.
◆ 제조업·바이오 넘어 IT·유통까지…산업계 옥죄는 ‘노조 리스크’
이 같은 리스크는 업종을 불문하고 주요 대기업 곳곳에서 표출되고 있다.
바이오 업계 선두인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최근 영업이익에 비례한 성과급 지급 기준 마련을 전면에 내걸며 사측을 압박하고 있다. 고도의 연구개발(R&D)과 막대한 시설 투자가 선행돼야 하는 바이오 산업의 특성을 외면한 채, 당장 눈앞의 단기 영업이익만을 기준으로 삼아 ‘성과급 잔치’를 벌이겠다는 무리한 요구라는 지적이 나온다. 글로벌 경쟁사들과의 격차를 벌려야 할 중요한 시점에 인건비 부담을 극대화해 기업의 미래 체력을 깎아먹고 있다는 비판이다.
현대자동차 역시 강력한 실리주의 기류 속에서 사측에 역대급 보상을 한꺼번에 요구하며 5차 본교섭까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노조는 올해 ‘전년도 순이익의 30% 성과급 지급’을 요구하고 나섰는데, 이를 환산하면 약 3조1000억 원으로 현대차의 올해 1분기 영업이익(약 2조5000억 원)을 훌쩍 웃도는 규모다.
특히 올해는 로봇 도입 등 사측의 생산 현장 자동화 전략에 맞서 노조가 “합의 없는 로봇 투입 불가”를 외치며 기술 도입 사전 협의 명문화와 대규모 정규직 신규 채용을 요구하고 있다. 사측은 글로벌 관세 부담과 중동 리스크 등으로 지난해와 올해 1분기 영업이익이 이미 감소세로 돌아선 상황에서, 과도한 인건비 부담과 하청 노조와의 ‘이중 교섭’ 리스크까지 겹치며 미래 모빌리티 투자 여력이 위축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카카오는 민주노총 화섬노조 카카오지회(크루유니언)를 중심으로 오는 10일 2006년 창사 이래 첫 본사 공동 부분파업과 판교 집회를 예고했다. 카카오 노사는 구체적인 임금 인상률과 함께 ‘1인당 500만 원 상당의 제한조건부주식(RSU)’을 성과급에 포함할 것인지를 두고 정면충돌했다. 사측은 이미 지급한 RSU를 성과급에 포함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노조는 이를 별도로 보아 보상 총액을 더 늘려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그동안 유연하고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자랑하던 IT 업계마저도 성과 보상 앞에서는 기성 노조 못지않은 강경 투쟁 노선으로 선회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경영진의 의사결정 실패에 따른 고용 불안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본질은 결국 ‘더 많은 주식과 보상’이라는 비용 청구에 집중돼 있다. 이에 카카오는 사법 리스크에 이어 내부의 극단적인 비용·투쟁 리스크에 발목이 잡히며 사면초가에 직면했다는 평가다.
◆ 법 체계가 키운 노조 리스크…노란봉투법 개정 시급
일각에서는 정치색을 뺀 젊은 세대 노조가 합리적인 협상을 전면에 내세운다고 평가하지만, 재계의 시선은 냉담하다. 업계의 불황이나 기업의 손실 등 경영 리스크는 철저히 외면한 채 고통 분담은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대기업 노조들이 연쇄 파업으로 사측을 압박할 수 있는 근본적 배경으로, 올해 3월 10일부터 시행된 개정 노동조합법(노란봉투법)의 독소 조항을 지목하고 있다.
개정 노란봉투법은 파업의 허용 범위를 ‘근로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사업 경영상의 결정에 관한 주장의 불일치’까지 대폭 확대했다. 과거 경영권의 고유 영역으로 분류돼 파업 대상이 되지 못했던 ‘성과급’이나 ‘미래 기술 도입’ 등의 사안이 모두 합법 파업의 빌미가 될 수 있도록 법적 길을 열어준 셈이다.
홍기용 인천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올해 초 대법원이 성과급은 통상임금이 아닌 ‘이익 분배’에 해당한다고 판결해 경영권 고유 사안임을 명확히 했음에도, 노란봉투법이 시행되면서 기업들이 노조의 무리한 성과급 요구 파업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에 직면했다”고 분석했다.
홍 교수는 “SK하이닉스가 지난해 9월 성과급 상한을 폐지하고, 삼성전자가 오랜 파업 진통 끝에 영업이익의 12% 배분 및 상한 폐지를 수용한 배경 역시 노란봉투법이라는 무기를 쥔 노조의 파업을 사측이 막아낼 방어 수단이 전무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과도한 성과급 요구가 원·하청을 가리지 않고 전 산업계로 들불처럼 번질 경우 원가 경쟁력으로 버텨온 국내 대다수 기업은 존립 자체를 걱정해야 할 것이라는 경고다.
그는 “시행 초기인 만큼 이익분배적 성과급을 이유로 한 파업의 합법성 여부는 향후 법원의 치열한 심리와 판례 형성을 지켜봐야 하겠지만, 근본적인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는 노동쟁의 요건을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추는 노란봉투법 재개정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미디어펜=조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