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조태민 기자]"이제 자동차의 운전대는 사촌 형(정몽구 회장)에게 넘깁니다. 우리는 새로운 길을 갑니다."
1999년 3월, 대한민국 경제계를 뒤흔든 거대한 폭풍이 범현대가(家)를 덮쳤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동생이자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의 아버지로 불리던 '포니 정' 고(故) 정세영 명예회장, 그리고 그의 아들 정몽규 회장이 자신들의 청춘과 혼을 바쳐 일구었던 현대자동차의 경영권을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올해(2026년) 발간된 IPARK현대산업개발(구 HDC현대산업개발)의 50주년 사사 《결정의 순간들》 제1장 후반부에는, 그동안 세간에 단편적으로만 알려졌던 1999년 현대자동차 분가 당시의 긴박했던 막전막후와 경영자로서 내린 잔인하고도 고독했던 결단의 비화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1999년 4월 1일 열린 현대산업개발 회장 취임식에서 정몽규 회장이 임직원들에게 취임사를 하는 모습./사진=IPARK현대산업개발
■ '포니 정' 부자의 청춘이 깃든 현대차를 떠나다
정몽규 회장에게 현대자동차는 단순한 직장이 아니었다. 부친 정세영 명예회장과 함께 맨땅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독자 모델 '포니(Pony)'를 출시하고, 글로벌 시장을 향해 "우리는 우리 길을 가겠다(We will go it alone!)"고 외치며 세계 무대에 명함을 내밀었던 피와 땀의 결정체였다. 그러나 범현대가 내부의 경영권 승계 구도가 요동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창업주 정주영 회장의 장자 계보인 정몽구 회장(현 현대차그룹 명예회장) 체제로의 일원화 요구가 거세진 것이다. 사사에서는 당시 정몽규 회장이 느꼈던 심경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목표했던 고지가 바로 저 앞인데, 한 정거장만 더 가면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를 완성할 수 있는데, 여기서 운전대를 놓아야 하는가"라는 처절한 고뇌였다. 부친 정세영 명예회장 역시 평생을 바친 자동차 산업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일화가 사사 곳곳에 묻어난다.
현대산업개발 임직원들이 독립 경영 체제 출범을 기념하고 있다./사진=IPARK현대산업개발
■ "종가(宗家)의 평화를 위해"… 젊은 총수의 아름다운 양보
결정의 순간은 잔인했지만 깔끔했다. 정몽규 회장 부자는 가문의 분란을 피하고 '현대'라는 거대한 이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조건 없는 양보를 선택했다. 현대자동차 주식과 현대산업개발의 지분을 맞교환하는 대대적인 계열 분리에 합의한 것이다. 이로써 1999년 8월, 현대산업개발은 현대그룹의 거대한 그늘에서 벗어나 'HDC 독립 왕국'으로서의 첫걸음을 떼게 된다. 자동차 레이싱 트랙에서 하루아침에 콘크리트 가득한 건설 현장으로 전쟁터가 바뀐 셈이었다. 당시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홀로서기에 나선 정몽규 회장은 "쇳물을 부어 차를 만들던 정밀한 공학적 마인드를 이제는 도시를 설계하고 인간의 삶을 담는 '디벨로퍼'의 철학으로 바꾸겠다"고 다짐하며 운동화 끈을 고쳐 맸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아이파크 전경./사진=IPARK현대산업개발
■ 압구정 현대의 명성을 '아이파크(IPARK)'로 진화시키다
현대산업개발을 맡은 정몽규 회장의 첫 번째 과제는 '현대건설'과의 차별화였다. 같은 뿌리에서 나왔지만 엄연히 다른 회사가 된 상황에서, 기존의 '현대아파트'라는 이름만으로는 독자적인 생존이 불가능했다. 여기서 탄생한 역작이 바로 2001년 론칭한 명품 브랜드 '아이파크(IPARK)'다. 과거 부친이 한국도시개발 시절 지었던 '압구정 현대아파트'의 고품격 주거 명성을 이어받으면서도, 현대적이고 세련된 도시형 주거 공간을 선보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삼성동 아이파크, 해운대 아이파크 등 대한민국의 부의 지도를 바꾼 랜드마크들이 모두 이 '분가의 결단'에서 파생된 결과물이었다. 자동차를 만들던 치밀함으로 아파트를 짓기 시작한 지 어느덧 27년. 사사는 1999년의 분가를 "가장 아픈 상실이었으나, 동시에 가장 거대한 창조적 파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약 그때 정몽규 회장이 운전대를 놓지 않았다면, 오늘날 주거 문화의 한 축을 담당하는 '아이파크'라는 브랜드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 기업의 역사를 넘어 대한민국 재계 역사상 가장 극적이었던 1999년의 분가 시나리오. [기획연재] 제3편에서는 현대산업개발이 본격적으로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하며 대한민국 국토의 지형을 바꾼 '분당·일산 신도시 건설과 땅 매입 작전의 막전막후'를 정밀 추적한다.
[미디어펜=조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