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산업의 경쟁 축이 하드웨어에서 인공지능(AI)과 데이터, 소프트웨어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자율주행과 차량 내 AI,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SDV)가 확산하면서 자동차의 성능뿐 아니라 데이터를 얼마나 확보하고 이를 기술과 서비스로 연결하느냐가 새로운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의 AI 전략과 이에 따라 달라지는 자동차 산업의 경쟁 구도와 사업 모델을 두 차례에 걸쳐 짚어본다. <편집자주>
[미디어펜=김연지 기자]완성차 업체들이 차량에 AI를 얹는 수준을 넘어 연구개발과 생산, 사내 업무 전반을 AI로 재편하고 있다. 자동차 개발과 생산 과정에서 축적한 데이터를 AI와 결합해 개발 효율과 생산성을 높이는 한편 자율주행과 로보틱스, 자율제조 등으로 활용 영역을 넓히는 모습이다.
보유한 데이터와 제조 노하우를 실제 업무와 사업에 얼마나 빠르게 적용해 성과로 연결하느냐가 중요해지면서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의 투자 경쟁도 확대되고 있다. 자체 AI 인프라를 구축하거나 전문 AI 기업과 손잡고 자동차 산업에 특화된 AI 모델을 개발하는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다.
13일 자동차업계에 따르면 현대자동차그룹은 AI를 차량뿐 아니라 제조와 로보틱스까지 아우르는 핵심 기술로 보고 관련 투자와 조직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BMW·폭스바겐·제너럴모터스(GM)·르노 등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도 차량 개발과 생산 과정에 AI를 적용하며 활용 범위를 넓히고 있다.
◆ 공장·로봇까지…현대차그룹 '피지컬 AI' 승부
현대차그룹은 AI 경쟁의 무대를 차량을 넘어 제조와 로보틱스 등 현실 세계로 넓히고 있다. 그룹은 지난해 10월 엔비디아와 손잡고 블랙웰 GPU 5만 개를 활용하는 'AI 팩토리' 구축 계획을 공개했다. 데이터 수집부터 학습·정밀화·추론까지 AI 모델의 전 과정을 관리하는 인프라를 기반으로 자율주행과 스마트팩토리, 로보틱스를 아우르는 '피지컬 AI' 기술을 공동 개발한다는 구상이다. 양사는 한국의 피지컬 AI 생태계 조성을 위해 정부와 함께 약 30억 달러 규모의 투자도 추진한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도 지난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AI 서밋에서 자동차 제조라는 전통적인 경계를 넘어 자율주행과 로보틱스, AI 기반 공장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해 '피지컬 AI 솔루션 기업'으로 전환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현대차그룹의 제조·모빌리티·로보틱스 역량과 운영 데이터를 엔비디아·웨이모 등 글로벌 기술기업의 AI 역량, 보스턴다이내믹스와 구글 딥마인드 간 협력 등과 결합해 피지컬 AI 생태계를 확대한다는 전략이다. 피지컬 AI는 AI가 자동차나 로봇 등 물리적 장치를 통해 현실 세계를 인식하고 판단해 행동하는 기술을 의미한다.
현대차그룹 싱가포르 글로벌 혁신 센터(HMGICS)에서 로봇을 이용해 자동차가 만들어지는 모습. 출처=HMGICS 제공
이를 뒷받침하는 기반은 그동안 추진해 온 디지털 전환(DX)과 AI 전환(AX)이다. 현대차그룹은 연구개발과 생산, 품질, 판매 등 각 영역에 흩어진 데이터를 '글로벌 원 데이터 파이프라인'을 통해 표준화·연결하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사내 생성형 AI 플랫폼 'H Chat Pro'를 일반 임직원에게 개방했으며 지난달 기준 이용자는 3만 명을 넘어섰다. 현대차·기아 일반·연구직 임직원의 약 80%에 해당하는 규모다.
AI를 실제 차량 개발과 생산에 적용한 성과도 나타나고 있다. 남양기술연구소의 '충돌안전 AI 어시스턴트'는 여러 시스템에 분산돼 있던 충돌시험 결과와 이미지, 해석 자료 등을 통합 검색하고 유사 사례를 비교·분석할 수 있도록 해 관련 사례 탐색과 분석 자료 검토 시간을 약 90% 줄였다. 생산 현장에서는 차량 식별번호(VIN)를 카메라와 AI로 자동 판독하는 'AI 자동화 인식 서비스'를 국내외 생산거점 약 70곳에 적용해 연간 52억4000만 원의 비용 절감 효과를 거두고 있다. 강화학습을 활용한 '대차 정렬 최적화 기술'로 불필요한 생산 중단 시간도 약 86% 줄였다.
AI 활용 범위는 서비스 영역까지 확대되고 있다. 해외 정비 현장에서는 대규모언어모델(LLM) 기반 AI가 차량 오류 코드와 증상을 분석하고 관련 매뉴얼과 과거 정비 기록을 토대로 진단을 지원하면서 정비 대응 시간이 약 42% 단축됐다. 고객 리뷰 대응에도 AI를 적용해 리뷰 한 건당 평균 처리 시간을 기존 35분에서 5분 수준으로 줄였으며 현재 전체 리뷰의 약 85% 이상을 AI 기반으로 처리하고 있다. 진은숙 현대차·기아 ICT담당 사장은 "중요한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AI를 비롯한 새로운 기술을 얼마나 빠르게 이해하고 업무와 사업에 적용해 조직 경쟁력으로 내재화할 수 있는지에 달렸다"고 말했다.
현대차그룹은 이 같은 AX 역량을 토대로 피지컬 AI 생태계를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지난해 11월 발표한 2030년까지 국내 125조2000억 원 투자 계획 가운데 AI와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SDV), 전동화, 로보틱스, 수소 등 미래 신사업 분야에 50조5000억 원을 배정했다. 연구개발과 제조 현장에서 축적한 데이터와 AI 활용 역량을 향후 자율주행과 로보틱스 등 피지컬 AI 분야로 확장한다는 구상이다.
◆ 자동차 개발·생산에 AI 심는다…'산업특화' 경쟁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도 AI를 차량 개발과 생산 현장에 직접 투입하고 있다. 자동차 개발 과정에서 축적한 설계·시험·생산 데이터를 AI 학습에 활용하거나 외부 AI 기업과 협력해 자동차 산업에 특화된 모델을 만드는 방식이다.
BMW는 지난 5월 프랑스 AI 기업 미스트랄 AI와 손잡고 차량 충돌 시뮬레이션에 특화된 AI 모델 개발에 나섰다. BMW는 매주 수천 건의 가상 충돌 시뮬레이션을 수행하며 1페타바이트(PB)가 넘는 데이터를 축적했다. 양사는 이 데이터를 AI 학습에 활용해 복잡한 개발 업무의 품질과 정확도, 속도를 높인다는 계획이다. BMW는 산업별 엔지니어링·시뮬레이션 데이터를 학습한 '대규모 산업 모델(Large Industry Model·LIM)'을 충돌 시뮬레이션에 적용하고 향후 차량 개발과 밸류체인의 다른 영역으로 활용 범위를 넓힐 방침이다.
BMW그룹이 프랑스 AI 기업 미스트랄과 손잡고 충돌 시뮬레이션에 특화된 AI 모델 개발에 나섰다./사진=BMW그룹 제공
폭스바겐그룹은 2030년까지 기존 투자 계획의 일환으로 AI 분야에 최대 10억 유로를 투입한다. AI 기반 차량 개발과 산업용 애플리케이션, 고성능 IT 인프라 등이 대상이다. 현재 그룹 내에서 1200개 이상의 AI 애플리케이션을 운영하고 있으며 AI 활용을 통해 2035년까지 최대 40억 유로 규모의 효율 개선과 비용 회피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실제 제조·설계·공정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대규모 산업 모델의 활용 가능성도 기술·산업 파트너들과 검토하고 있다.
GM은 AI와 가상 시뮬레이션을 결합해 차량 개발 과정을 단축하고 있다. 지난 6월 공개한 차량 개발 사례에서는 머신러닝과 시뮬레이션을 활용해 기존 8~40시간이 걸리던 차량 지붕 압축 분석을 5분 이내로 줄였다. 실제 차량을 제작해 시험하기 전 더 많은 설계 조건을 가상 환경에서 검증할 수 있도록 해 개발 과정의 반복 속도를 높이는 방식이다. GM은 이 같은 디지털 개발 체계를 설계와 검증뿐 아니라 제조 과정까지 연결하고 있다.
르노그룹도 지난 3월 발표한 중장기 전략 '퓨처레디(futuREady)'를 통해 AI와 디지털트윈, 로보틱스를 생산 혁신에 활용하고 있다. 공장의 디지털트윈인 '산업 메타버스'에서 생성되는 50억 개의 데이터 포인트를 활용해 예측정비를 강화하고 공장 가동 중단 시간을 절반으로 줄이는 것이 목표다. 2027년까지 생산 현장에 차세대 휴머노이드 로봇 350대를 투입하고, 2030년까지 차량 한 대당 생산시간을 30%, 생산비용을 20% 줄인다는 목표도 세웠다.
완성차 업체들이 산업특화 AI에 주목하면서 자동차 제조 과정에서 축적한 데이터의 가치도 커지고 있다. 충돌시험과 설계, 생산, 품질관리 등 수십 년간 쌓아온 산업 데이터를 AI 학습에 활용해 개발 효율과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새로운 경쟁 영역으로 떠오르는 모습이다.
업계 관계자는 "완성차 업체 간 AI 경쟁의 범위가 차량에 어떤 기능을 넣느냐에서 회사가 보유한 데이터와 AI를 연구개발·생산·서비스에 얼마나 빠르게 적용하느냐로 넓어지고 있다"며 "자동차를 만드는 과정에서 쌓아온 데이터와 제조 노하우를 AI와 결합해 실제 생산성과 사업 성과로 연결하는 역량이 다음 라운드의 경쟁력을 가를 것"이라고 말했다.
[미디어펜=김연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