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소희 기자] 농촌진흥청이 추석·설 명절 선물용 ‘큰 배’에 맞춰져 있던 국내 배 시장의 구조를 바꾸기 위해 ‘설원’·‘슈퍼골드’·‘그린시스’ 등 일명 녹색배 품종 보급 확대에 나선다.
농진청이 배의 산업구조 확대를 위해 보급에 나선 일명 녹색배의 새 품종인 ‘그린시스’./자료사진=농진청
그간 품종에 과도하게 의존해 온 생산·유통 구조에서 벗어나 맛과 식감, 크기, 숙기 등이 다양한 국산 배를 평상시에도 소비할 수 있는 시장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국내 배 산업은 ‘신고’ 편중이 심각하다. 2025년 기준 ‘신고’ 재배면적은 전체 배 재배면적의 85.4%에 달한다.
오랫동안 명절 선물용 수요가 배 시장을 좌우하면서 농가의 재배와 출하 전략 역시 추석과 설에 집중돼 왔다. 하지만 최근 과일 소비가 명절 선물용에서 벗어나 일상 소비 중심으로 바뀌면서 배 역시 ‘크고 보기 좋은 상품’에서 벗어나 먹기 편한 크기와 다양한 맛을 갖춘 품종으로 소비자 선택지를 넓혀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농진청이 녹색배를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존 갈색배와 확연히 다른 녹색 과피를 통해 소비자가 새로운 품종임을 쉽게 인식할 수 있고, 품종마다 맛과 식감 등 차별화된 강점을 내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설원’·‘슈퍼골드’·‘그린시스’…맛·식감으로 승부
대표적인 새 품종이 ‘설원’으로 9월 상순 수확하는 조생종이다. 평균 과중은 600g, 당도는 14브릭스 이상이며 단맛이 뛰어나면서 과육이 아삭하고 갈변 속도가 느려 조각 과일로 활용하기에도 적합하다. 과실 크기와 품질이 균일해 선별·포장이 쉽다는 점도 대량 유통에 유리한 요소다.
‘슈퍼골드’는 평균 570g, 당도 13.6브릭스 수준으로 은은한 산미를 갖춘 것이 특징이다. 단맛과 신맛이 조화를 이루는 새콤달콤한 맛으로 차별화했고, 중도매인 대상 시장성 평가에서 선호도 1위를 차지했다. 유통 전문가 종합만족도도 5점 만점에 4.25점으로 평가됐다.
‘그린시스’는 세 품종 가운데 상대적으로 작은 평균 460g 크기로, 녹색 껍질과 풍부한 과즙, 아삭한 식감이 강점이다. 특히 검은별무늬병에 강해 생산 안정성이 높고, 저장성이 좋아 저온 저장 후 다음 해 6월까지 유통된 사례도 있다.
이들 녹색배는 아직 생산 기반이 크지는 않다. 2025년 기준 재배면적은 설원 10ha, 슈퍼골드 27ha, 그린시스 43ha에 그친다.
농진청은 안정적인 물량 확보와 품질 관리를 위해 지방정부와 전문 유통조직이 참여하는 생산단지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설원의 경우 울산에서 2029년까지 10ha, 나주에서 2030년까지 30ha 규모의 생산단지 조성이 추진된다.
‘신고’ 85.4% 편중…가격·소비·기후변화 대응에 한계
농진청이 품종 다변화를 서두르는 것은 새로운 품종을 늘리는 차원을 넘어 배 산업의 구조적인 문제와 맞닿아 있다.
‘신고’는 1927년 일본에서 육성돼 국내에 도입된 품종으로, 1980년대 전체 배 재배면적의 35% 수준에서 1990년대 후반 70%, 현재 85.4%까지 비중이 확대됐다. 1990년대 지베렐린 처리 기술이 개발되면서 수확 시기를 앞당기고 과실 크기와 수확량을 늘릴 수 있게 된 데다 저장·재배·유통체계까지 ‘신고’ 중심으로 구축되면서 품종 편중이 더욱 심화됐다.
문제는 이 같은 단일 품종 구조가 시장 변화에 취약하다는 점이다. 한꺼번에 출하가 몰리면 가격이 떨어질 수 있고, 소비자가 원하는 다양한 맛과 크기에 대응하기도 어렵다. 특히 추석이 이른 해에는 명절 수요에 맞추기 위해 덜 익은 ‘신고’를 출하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농진청은 설명했다.
유통시장 역시 맛보다 크기와 외관을 중심으로 가격을 매기는 구조가 고착되면서 소비자 만족도가 떨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대과 중심 생산은 핵가족화와 소비 편의성 중시 등 달라진 소비 환경과도 맞지 않아 장기적으로 소비 감소와 가격 하락, 농가 경영 악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기후변화도 품종 다변화 필요성을 키우는 요인이다. 농진청에 따르면 기후변화로 개화기가 빨라지면서 저온 피해가 증가하고 있고, ‘신고’는 꽃가루가 없고 개화기가 빨라 안정적인 생산량 확보에 어려움이 있다. 최근에는 9월 고온에 따른 과실 장해도 늘고 있다.
다만 품종 전환이 단기간에 이뤄지기는 어렵다. 과수는 통상 20~30년의 과원 갱신기에 새 품종을 심고, 특히 배는 주 품종으로 자리 잡으면 50년 이상 재배할 수 있어 품종 교체 속도가 느리다.
또 농가 입장에서는 경제적 부담도 크다. 품종을 갱신하면 수확과 소득이 없는 기간이 3년 이상 발생하는 소득 공백기가 생긴다. 게다가 전국의 기후와 토양 조건이 다양해 농가들은 신품종을 일부 면적에 먼저 심어 지역과 과원에 적합한지를 확인한 뒤 재배면적을 확대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신품종의 시장 안착을 위해서는 단순히 묘목을 보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생산단지 조성→물량 확보→선별·유통→소비자 인지도 제고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는 의미다.
실제로 농진청은 개별 농가 단위의 소량 생산만으로는 대량 유통과 인지도 제고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지역별 특화품종 생산단지 조성을 추진해 왔다. 소량 생산될 경우 도매시장에서 기타 품목으로 분류돼 품질에 비해 가격을 낮게 평가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주, 신품종 비중 25.8%…대체 품종 가능성 보여
국내 최대 배 주산지인 나주의 변화는 품종 다변화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2025년 나주의 배 재배면적은 1642ha로 전국 배 재배면적의 약 18%를 차지한다. 이 가운데 국내 육성 품종 재배면적은 425ha, 25.8%다. 전국 평균보다 약 1.8배 높은 수준이다. 신화 55ha, 창조 39ha, 슈퍼골드 15ha, 화산 17ha 등 다양한 국내 육성 품종이 재배되고 있다.
농진청은 나주시의 국내 육성 품종 비율이 4분의 1을 넘어선 것을 생산·유통 현장에서 품종의 우수성이 인정받고 있다는 신호로 보고 있다. 다양한 맛과 숙기, 크기를 가진 품종으로 전환하는 기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녹색배 확산의 또 다른 과제는 소비자의 인식이다. 기존 배와 달리 껍질이 녹색인 만큼 처음 접하는 소비자에게는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농진청이 실시한 유통 현장 평가에서는 긍정적인 반응이 확인됐다. 중앙청과 중도매인 대상 시식 평가에서 녹색배는 당도와 식감, 저장성이 우수해 대량 유통에 유리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과피 표면의 코르크화 역시 과실 품질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아 품질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프리미엄 선물뿐 아니라 배의 연중 소비 확대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현재 가장 큰 한계로는 물량 확보 부족이 꼽혔다.
녹색배 특유의 과피 표면 코르크화는 관리와 홍보를 병행해 풀어갈 계획이다. 농진청 관계자는 “코르크화는 생육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으로 당도나 식감 등 내부 품질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며 “재배 과정에서 통풍과 배수 등을 관리해 발생을 줄이는 동시에 자연스러운 코르크화를 녹색배만의 외관 특성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배 산업의 품종 전환은 결국 ‘명절에 한 번 먹는 과일’에서 ‘평소에도 골라 먹는 과일’로 소비 패턴을 바꾸는 작업에 가깝다. 이를 위해서는 품종 자체의 경쟁력뿐 아니라 안정적인 생산량과 유통망, 소비자 인지도까지 함께 확보해야 한다.
농진청도 앞으로 이상기후와 병해충에 대응할 수 있도록 개화기가 늦거나 자가결실성이 있는 품종, 화상병·검은별무늬병 저항성 품종 등을 육성하고, 당도·식감·저장성 등 소비자 선호 특성을 갖춘 품종 개발을 확대할 계획이다. 보급 과정에서는 재배기술과 선별 기준을 마련하고 생산단지와 유통·소비 홍보를 연계해 안정적인 물량과 품질 관리에도 힘을 쏟을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