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조우현 기자]한국전력공사가 제안한 25조 원 규모의 ‘5년 치 전기요금 선납’ 방안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공식 거절하면서, 정부가 추진하던 인프라 재원 조달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업계와 경제계 및 학계 등 모두 이번 삼성과 SK의 결정에 대해 경제 논리에 따른 합리적인 선택이었다는 반응이다.
15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한전이 제안한 전기요금 선납 방안을 검토한 끝에 최종적으로 ‘수용 불가’ 입장을 전달했다.
요금 정상화를 미뤄 빚더미에 앉은 공공부문의 부실을 민간 기업의 유동성으로 메우려던 시도가 결국 좌초된 셈이다. 특히 이번 거절은 과거 관치 관행에 순응하던 대기업들이 독립된 경제 주체로서 책임 있는 경영 판단을 내린 장면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요금 정상화를 미뤄 빚더미에 앉은 공공부문의 부실을 민간 기업의 유동성으로 메우려던 시도가 결국 좌초된 셈이다. 특히 이번 거절은 과거 관치 관행에 순응하던 대기업들이 독립된 경제 주체로서 책임 있는 경영 판단을 내린 장면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사진은 한국전력 본사 전경. /사진=한전
◆ ‘국채 금리 이상 혜택’에도 일축… “다운턴 공포와 자본 효율성이 우선”
한전은 선납 금액(삼성 20조 원, SK하이닉스 5조 원)에 대해 국고채 2년물 금리 이상의 이자를 적용해 반기 단위로 전기요금을 차감해 주겠다는 유인책까지 제시했으나 양사를 설득하지 못했다.
반도체 기업들의 거절은 극심한 경기 변동성과 자본 배분의 효율성을 고려한 합리적 판단의 결과라는 게 중론이다.
경제계에서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매몰비용 대신 기회비용을 택한 것은 당연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기업 입장에서 25조 원이라는 막대한 비용을 매몰비용으로 처리하기보다 미래를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비용으로 두는 것이 합리적 방안이라는 것이다.
인공지능(AI) 열풍으로 HBM(고대역폭메모리) 중심의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2~3년 뒤 닥칠지 모를 다운턴에 대비해야 하는 상황에서 25조 원이라는 막대한 유동성을 공기업에 묶어두는 것은 심각한 경영 리스크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특히 학계에서는 양사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지적한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기업들은 업황의 사이클 리스크와 예측 불가능성을 근거로 들었지만, 실제 제시된 이자율은 3% 수준으로 미국 국채보다도 낮아 25조 원을 5년이나 묶어 둘 실익이 없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이사회가 시장금리보다 낮은 대가로 25조 원 규모의 자금을 5년 간 한전에 선지급하기로 결정한다면 이는 이사의 선관주의의무 위반 소지가 있어 애초에 이사회 통과가 쉽지 않은 사안”이라고 말했다.
◆ 시장 왜곡이 부른 참사…“공공부문 역할은 정부가 부담해야”
이번 사태는 정치 논리가 시장 가격을 왜곡했을 때 발생하는 비용이 어떻게 민간 경제를 위협하는지 보여줬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한전의 총부채는 210조 원을 돌파했고 하루 이자만 115억 원에 달한다. 원가 상승을 제때 반영하지 못한 누적 적자 탓에 차세대 반도체 클러스터 전력망을 깔 여력조차 잃은 것이다.
여기에 한전채 남발에 따른 채권시장 교란을 우려한 재정 당국이 민간 기업의 현금을 조달 창구로 지목하면서 ‘변칙적 강제 차입’ 논란을 자초했다.
최 명예교수는 “제안의 실질적 배경은 한전이 신규 한전채 발행 부담을 줄이려는 데 있다”며 “두 기업이 선납에 응했다면 한전이 회사채 시장에서 조달해야 할 자금을 저리로 대체 조달해 주는 셈이 돼, 한전의 재무 리스크를 민간 기업이 떠안는 구조가 된다”고 짚었다.
이어 “유사한 요구가 반복되거나 다른 대형 전력 소비 기업에도 관행처럼 확산될 ‘나쁜 선례’를 막았다는 점에서 이번 거절은 지극히 합리적”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미국이나 일본 등 주요국이 법률에 기반해 수십조 원의 보조금을 지급하고, 전력·용수 등 핵심 인프라를 국가 예산으로 구축해 주는 흐름과도 비교가 된다. 공공재의 관리는 정부의 몫이다. 모든 국민에게 편의를 주는 전기 문제는 민영화나 사기업에 부담을 떠넘길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부가 공공재 공급의 책임을 저버린 채, 기업이 쓸 전력이니 기업 돈으로 공사비를 대라는 식의 행태를 보였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는 이유다.
업계에서는 이번 결정을 두고 대기업들이 정부의 정책적 요구보다 주주가치와 시장 논리에 기반한 경영 판단을 우선시한 사례로 보고 있다. 외국인 지분율이 높은 대형 상장사로서 배임 논란이나 자본 효율성 훼손을 감수하기 어려웠다는 해석이다.
정부가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가동을 위한 전력망 확충이 시급한 만큼, 정부 재정 투입이나 한전채 발행 한도 연장, 전기요금 추가 인상 등 현실적인 대안을 다시 검토해야 하는 상황이다.
정부 입장에서 인프라 조성을 위해 정부 재원을 투입하거나 전기료를 인상해야 하는데, 이를 국민적 반발을 우려해 민간 기업으로 부담을 전가하려다 막힌 것이라는 게 재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재계 내 한 관계자는 “공공부문의 부담은 정부가 부담해야 하는데, 이를 민간 기업의 유동성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구조적으로 한계가 뚜렷하다”며 “재정 투입이나 요금 체계 개편 등 투명하고 원칙적인 방식으로 인프라 투자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디어펜=조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