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연지 기자]유럽과 신흥국 시장을 삼킨 중국 전기차의 공세가 사실상 봉쇄되어 있던 미국 본토까지 위협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현지 공장 설립과 미국인 고용을 조건으로 중국 자동차 업체의 미국 내 생산을 용인할 수 있다고 밝히면서다. 고율 관세 장벽이 무너질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미국 완성차 업계는 물론 현대자동차그룹에도 중국 업체의 진입 가능성이 새로운 경쟁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15일 완성차업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1일(현지시간) 폭스뉴스 프로그램 '잉그레이엄 앵글'과의 인터뷰에서 중국 자동차 업체의 미국 현지 생산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이 미국에 들어와 공장을 열고 자동차를 생산하고 싶어 한다면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자동차 업체들의 미국 현지 생산을 언급하며 "중요한 것은 그들이 우리 국민을 고용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중국 업체가 멕시코에서 차량을 생산한 뒤 미국으로 수출하는 방식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중국 전기차의 미국 현지 생산 가능성을 표현한 일러스트. 중국 자동차 업체의 미국 진출이 현실화할 경우 현대차·기아를 비롯한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의 미국 시장 경쟁이 한층 치열해질 전망이다./사진=AI 생
현재 중국 자동차 업체의 미국 진출에는 높은 장벽이 세워져 있다. 중국산 전기차에는 100%를 웃도는 관세가 부과되고 중국과 연계된 커넥티드카의 미국 내 판매·생산을 제한하는 규제도 시행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실제 정책 변화로 이어질 경우 중국 업체들이 현지 생산을 통해 높은 관세 장벽을 피하고 미국 시장에서 본격적인 경쟁에 나설 가능성이 커진다.
◆ 중국 전기차 톱6 글로벌 점유율 62%…미국은 견제 강화
중국 업체의 미국 진입 가능성이 주목되는 것은 이미 세계 전기동력차 시장에서 중국계의 영향력이 빠르게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KAM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글로벌 전기동력차(BEV·PHEV) 판매량은 884만7000대로 전년 동기 대비 2.6% 증가했다. BYD와 지리그룹, 상하이자동차그룹(SAIC), 체리자동차, 리프모터, 창안그룹 등 중국계 6개 그룹이 판매 상위 10위 안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 6개 그룹의 합산 판매량은 550만4000대로 전년 동기 대비 11.6% 증가했다. 글로벌 전기동력차 시장 점유율도 지난해 상반기 57.2%에서 올해 62.3%로 5.1%포인트 상승했다. 현대차그룹은 전년보다 27.4% 증가한 35만8000대로 8위를 기록했다.
중국 업체들은 내수를 넘어 해외시장에서도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KAMA는 중국계 업체들이 유럽과 신흥시장을 중심으로 수출과 현지 진출을 가속하면서 글로벌 전기동력차 시장의 과점화가 심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반면 미국에서는 중국 자동차 산업에 대한 견제가 이어지고 있다. 중국 업체의 직접 진출뿐 아니라 미국 기업과 중국 기업 간 협력도 도마에 올랐다. 숀 더피 미국 교통부 장관은 최근 짐 팔리 포드 최고경영자(CEO)에게 서한을 보내 포드가 미시간 공장에서 CATL의 라이선스 기술을 사용하는 점과 지리와의 협력 등을 문제 삼으며 중국 기업과의 관계에 우려를 나타냈다.
더피 장관은 포드와 BYD 간 하이브리드 부품 관련 협의 가능성에도 우려를 표했다. 이후 공화당 의원들도 포드의 중국 기업과의 사업 관계를 비판하고 나섰다. 포드는 미시간 배터리 공장을 직접 소유·운영하고 있다는 점 등을 들어 행정부의 주장을 반박했다.
이처럼 중국 자동차 산업과의 연결고리까지 경계하는 상황에서 나온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기존 미국의 대중국 자동차 정책과 온도 차를 보인다. 중국 업체의 미국 현지 생산이 실제 허용될 경우 유럽과 신흥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해온 중국 업체들에 새로운 시장이 열릴 수 있다. 다만 정치권과 자동차 업계의 반발, 기존 규제 등을 고려하면 실제 진입 여부는 아직 불확실하다.
◆ 최대 시장서 중국차와 맞붙나…현대차·기아 '촉각'
현대차그룹에는 중국 업체의 미국 진입 가능성이 더욱 민감한 변수다. 미국은 현대차그룹의 최대 판매 시장으로, 현대차·기아는 지난해 미국에서 183만6172대를 판매해 역대 최대인 11.3%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올해 들어서는 미국 시장 내 입지를 한층 넓히고 있다. 지난달 현대차그룹의 미국 시장 점유율은 12.9%로 포드(12.2%)를 제치고 월간 기준 3위에 올랐다. GM(16%)과 토요타그룹(15%)에 이어 미국 '빅3' 가운데 하나인 포드를 넘어선 것이다.
미국 시장에서 입지를 빠르게 확대하고 있는 현대차·기아에 중국 업체의 미국 진출은 새로운 경쟁 변수다. BYD·지리·체리 등 중국 업체들이 전기차와 PHEV를 앞세워 유럽과 신흥시장 등으로 빠르게 영역을 넓히고 있는 만큼 미국 시장에서도 전동화 주도권을 둘러싼 경쟁이 한층 치열해질 전망이다.
가격 경쟁력도 변수로 꼽힌다. 중국 업체가 미국 현지 생산에 나설 경우 현재 중국산 수입차에 부과되는 높은 관세를 피할 수 있다. 다만 미국 내 공장 건설과 인건비, 공급망 구축 등에 따른 비용이 발생하는 만큼 중국에서 생산할 때의 가격 경쟁력을 미국에서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현대차그룹 역시 미국 현지 생산 기반을 강화하고 있다. 조지아주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를 중심으로 생산능력을 확대하고 전기차뿐 아니라 하이브리드 등으로 현지 생산 차종을 넓히고 있다. 중국 업체의 미국 생산이 현실화하면 현지 생산 기반을 갖춘 완성차 업체 간 제품·가격·전동화 경쟁도 한층 치열해질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 업체가 실제 미국 시장에 진입하기까지는 커넥티드카 규제를 비롯한 제도적 장벽과 현지 생산·공급망 구축 등 넘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면서도 "현대차·기아가 미국에서 점유율을 끌어올리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 업체의 진입이 현실화할 경우 최대 시장에서의 경쟁 구도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예상된다. 향후 미국 정부의 정책 변화를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미디어펜=김연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