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되면 제탓 못되면 조상 탓"…전근대적 농경사회 벗어나지 못해
   
▲ 한영수 서강대 연구교수
주술적 집단의식의 공격성

독일의 고전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세계종교를 비교 연구하여 자본주의가 서양에서 발생한 이유를 근대화라는 개념과 함께 설명하고자 시도하였다. 베버는 전통사회에서는 왕이라는 개인의 자의적 판단 혹은 사제 집단의 종교-주술적 믿음에 의존하여 운영하는 주술적 지배 사회를 전근대의 속성으로 보았다. 이와 달리 탈주술화, 합리화 및 지성화 등을 근대사회의 핵심적 특징으로 보았다. 합리적 이성에 의존하는 관료 집단이 주술에 의존하는 왕과 사제를 대신하는 ‘합리적 지배’ 를 근대의 특징이라고 보았다.
우리나라는 서구문명권에 뒤처진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을 빠른 시간에 따라 잡기 위해서 압축적 성장을 이루어 냈다. 세계사적으로 자랑할 만한 경제적 성과를 이루었고 경제개발에 이어 민주화도 이루어냈다. 그러나 산업화와 경제화를 동시에 이루었지만, 우리 사회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 사회는 아직 상당 부분 주술적이고 비합리성이 지배하고 있고 전근대 농경사회의 집단의식으로 사로 잡혀있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는 그레고리 교황이 만들어낸 역법 체제에 기초한 양력 체제를 따르고 있다. 하지만 전근대의 농업사회에서 사용되었던 음력에 기초한 설과 추석 연휴기간 동안 우리는 도시를 떠나 귀경을 한다. 가족들을 다시 만나고 명절음식을 함께 만들어 먹는다고 하니 어찌 아름다운 우리 고유의 민속명절이 아닌가? 

이 명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은 남자들은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잡담을 하면서 술을 마시지만, 여자들은 엄청난 노동을 하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고 칼로리에 다 먹지도 못하는 양의 음식을 산더미처럼 만들어 낸다. 하루 종일 기름 냄새에 전을 붙이면 머리가 아프다. 허리와 손목이 아픈 것은 당연하다. 죽은 조상신에게 기복을 바라면서 제사를 지낸다. 원칙적으로 남자만 제사에 참여할 수 있다.

제사가 끝나고 음식을 나누어 먹고 나면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고궁에 나들이를 가고 윷놀이나 널뛰기를 한다. 물론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그렇게 아름답게 묘사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 술을 마신 후 싸우거나 언쟁을 한다. 밥상머리 토론회를 벌인다. 항상 욕하면서 관심을 가지는 정치판 이야기부터 사적인 재산문제, 취업, 결혼 등 각종 주제로 감정을 소모하는 싸움을 벌인다.

그뿐인가 아이들 세뱃돈까지 동원하여 고스톱 판을 벌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죽은 조상신에게 기복적 제례의식을 치룬 후 고칼리 음식과 술을 배불리 먹고 마신 후 가족간의 도박전을 벌인다. 도박은 개인의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우연에의 하여 경제적 득실이 결정된다. 역시 주술적이다! 
그뿐인가, 우리 나라의 대부분의 종교는 종교의 본연의 의미와 가르침과 달리 원시인들의 무의식을 지배하였던 기복적이고 샤마니즘의 변형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불교나 기독교 모두 이러한 우리 사회의 왜곡된 종교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수능시험이 다가오면 자식의 성공을 위해 절을 찾거나 교회를 찾는 것은 사실 각각의 종교의 본질이 아니라 기복이다. 현대 종교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샤머니즘이다. “예수 믿고 부자되었다. 할레루야”라든지. 절에 가서 부처님 덕에 부자가 되려는 욕심에서 비싼 돈을 들여 연등을 산다. 해당 종교 본연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소리이고 유달리 우리 나라 사람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주술적 종교관이 만들어낸 관행이다.

   
▲ 나이가 연로한 대기업 총수들을 국회에 끌어내어 나이 어린 국회의원들이 총수들에게 큰 목소리로 겁주고 협박을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대기업에 취업하고 싶어한다./사진=연합뉴스

이뿐인가, 우리나라 태극기는 중국의 주역의 상징을 가져다 만들었다. 현대사회에서 어느 나라도 주술 서적에 나오는 상징을 국가의 상징으로 삼지는 않는다. 주역의 발상지인 중국과 대만의 국기도 이렇지는 않다. 더 심각한 것은 현재의 태극기를 누가 만들었는지 확정적 사실도 없다. 박영효가 만들었다는 기존의 설과 '이응준'이 만들었다는 하는 현재의 국사학계의 지지하는 설이 있다.

그런데 이응준은 도대체 누구인가? 우리가 왜 그 사람이 주역의 점괘를 사용하여 만든 국기를 근대 국가의 상징으로 받아 들여야 하는가?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민주공화국인데 중국의 고대 점괘가 국가의 상징이라는 사실을 지금까지 무비판적으로 받아 들인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는 과학문명시대에 합리성, 법과 원칙을 근대 국가의 기본 원리로 삼아야 하지만, 그런 주술적 상징을 거부감없이 받아 들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여전히 고대 사회의 무의식에 기반한 집단 원형적 세계관과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한 기복적 세계관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연 초나 설날이면 공중파 텔레비전에 점술가가 등장하여 한 해 운수를 보는 방송을 방영한다. 서민층부터 사회지도층까지 무당을 찾아가 점을 보고 손금도 보고 주역, 자미두수, 토정비결부터 서양의 타로점까지 본다. 대통령이 무당의 꼭두각시 였다고 대통령을 비판하지만 우리는 주술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문제의 출발점을 과거에서 살펴보자. 조선사회는 지배계급부터 중국의 주술서인 주역을 경전으로 삼는 성리학을 국가의 통치원리로 삼았다는 것이다. 유학은 흔히 사서삼경 (四書三經) 내지 사서오경이라 불리는 서적을 신성시한다. 사서는 “논어”, “대학”, “중용” 및 “맹자”이다.

삼경은 “주역 (역경)”, “시경”, “서경”이고 여기에 “춘추”와 “예기”를 더하여 오경이라고 부른다. “주역”은 유교에서 가장 먼저 경전의 지위를 얻었다. 주나라의 역경이라는 책이다. 주역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서적이다. 진시황제가 유학자를 생매장하고 유학서적을 모두 불태우는 분서갱유의 광풍에서도 주역은 살아남았다. 진나라는 주역을 실용서로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국 고대사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자. 19세기까지 주(周)나라가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가장 오래된 중국 왕조였다. 주나라 이전의 왕조는 문헌상으로 기록이 남아 있는 그 실체를 인정받지 못했다. 19세기 말 청나라 시골 농부가 자신의 밭을 갈다가 이상한 문양이 있는 거북이 껍질과 동물의 뼈를 발견하였다. 농부는 발견물의 실체를 모르고 한약방에 팔았다. 이후 왕의영이라는 금석학자가 한약방에서 거북뼈와 동물뼈가 고대 갑골문임을 발견한다. 이를 계기로 고고학적 발굴이 진행되어 문헌 상에만 기록되어온  은왕조의 옛터 (은허 殷墟)를 찾아내고 은나라가 실존하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왕조로서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갑골문은 어떠한 것인가? 은왕조는 거북의 껍질이나 소뼈 등에 불에 달군 쇠로 질러 그 균열을 보고 신탁(神託 Oracle)을 받은 왕이나 종교사제가 길흉화복을 예측하였다. 갑골문이란 은왕조의 이러한 기복적 행위가 기록된 동물의 껍질과 뼈를 말한다.

데이터베이스 분야 세계 1위 기업인 Oracle사가 신탁(神託)을 의미하는 Oracle 을 사용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은나라는 중국에서는 상(商)이라고 부르는데 은나라 이전의 왕조로는 하(夏)나라가 있다고 중국은 주장하나 국제적으로 공인되지 못한다. 하나라 이전의 역사시대는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라고 하는데 전설상의 신화적 인물이 지배하는 시대를 말한다.
그렇다면 주역의 기원을 살펴보자. 주역의 출발은 중국의 신화적 인물 복희 (伏羲)에서 출발한다. 복희는 인간의 머리는 인간의 모양이나 하체는 뱀의 몸을 가지고 있다. 중국의 삼황오제 중 하나이다. 전설에 따르면 복희가 황하 유역을 통치하던 시절 머리는 용이고 몸은 말인 용마(龍馬)가 황하에 나타났다. 그 용마의 몸에 어떠한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복희는 그 무늬를 1부터 10까지의 수를 가지고 우주만물을 구성하는 원리라고 해석하였다 주희 이것을 바탕으로 팔괘(八卦)를 만들었다. 팔괘는 태극기의 밑바탕이다. 

복희가 만든 이 팔괘가 주역의 출발이고 용마의 몸에 있던 그림을 사람들을 “하도(河圖)”라고 부르게 된다. 복희의 팔괘는 주왕조의 문왕과 무왕이 더 발전시키고 공자가 집대성하였다. 주나라의 왕이 만들었기에 주나라의 역경을 의미하는 주역이라는 명칭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주역은 복희부터 공자까지 약 3천년의 세월에 걸처서 고대 중국인들이 보아 온 점을 정리학 주술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 현대사회 어느 나라도 주술 서적에 나오는 상징을 국가 상징으로 삼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나라 태극기는 중국의 주역의 상징을 가져다 만들었다./사진=연합뉴스

그런데 주역이 말하는 점은 우리 개인의 일상에 궁합이나 운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대사와 관련하여 의사결정의 판단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주역의 해설서나 인터넷 강연에서 개인의 기복과 운세를 보기 위한 주역 강의는 사실상 주역을 엉터리로 해석한 것이다. 

오히려 주역의 본질은 현재 경영학에서 위험 (risk)가 따르는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시스템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농사를 언제 지을 것인가?” 혹은 “전쟁을 할 것이인가?” 등의 질문을 대답하기 위해 점을 보았고 이 점괘를 사제 또는 왕이 해석하고 그 결과 책임을 묻는 것이다. 따라서 경영정보시스템에서 사용하는 의사결정시스템이나 과거의 기록을 바탕으로 분석적 해석을 하는 현대 통계학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역과 관련된 중요한 집단적 원형 사고를 살펴보자. 고대 사회에는 오늘날과 같이 과학기술이 발전하지 못하였다. 불확실성이 강하게 작동하는 천재지변과 농사 및 전쟁 등에 관한 결정은 공동체의 운명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이러한 의사결정을 신의 뜻을 전달하는 신탁 즉 왕이나 사제가 그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러한 해석을 내린 자에게 공동체는 정치적 권력을 인정하지만 책임도 동시에 묻는다. 

의사결정을 점괘에 의존하고 그것을 해석한 종교 지도자나 왕에게 책임을 묻는 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인가? 결과가 좋으면 지배의 정당성이 확보되지만 결과가 나쁘면 그 책임을 물어 사제나 왕을 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불확실한 상황에 대한 결단의 책임을 묻기 위해 지배자를 살해하는 주술적 행위는 고대 사회의 경우 전지구적으로 일어나 보편적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19세기 영국의 인류학자 프레이저가 “황금가지”라는 저서에서 집대성하여 정리하였다.

“황금가지”는 전세계 고대 사회에서 신하들이 사제왕(司祭王)을 살해하는 관습을 다룬다. 전세계 곳곳의 고대사회에서는 사제왕이 자연사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사제왕을 노쇠하거나 병들면 그 왕을 살해하고 젊은 왕으로 교체하였다. 사제왕은 얼굴에 주름이 생기거나, 새치가 생기고, 이빨이 빠지거나 잠자리에서 남자 구실을 못할 경우에도 목숨을 보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프레이저는 과거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왕이 견책당했다는 우리나라의 예를 들기도 하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부여에서도 이러한 관습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근세에도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긍인 지은 조선시대 야사 (野史) “연려실기술 (燃藜室記述)”을 살펴보자: 

태종 말년에 큰 가뭄이 닥쳤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방의 논은 갈라졌고 밭은 타 들어 갔으며 백성들은 풀뿌리로 먹을 것을 대신했다. 오랜 가뭄으로 민심은 날로 더욱 흉흉해져 갔고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태종도 각 고을 관찰사들을 불러 민심을 수습하지 못하는 것을 꾸짖었으나 오랜 가뭄으로 곡식이 없고 설상가상으로 괴질까지 번지고 있다는 말을 듣자 태종은 가뭄 속 땡볕 아래 종일토록 앉아 하늘에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빌었다.

태종은 죽기 전까지도 기우를 위하여 노력하다가 승하하기 직전에 "내가 죽어 영혼이 있다면 반드시 이 날만이라도 비를 내리게 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 태종의 기일인 음력 5월 10일에는 어김없이 비가 내렸는데, 사람들은 이 비를 태종 우(太宗 雨)라고 불렀다 (출처: 박찬희, 조선왕조 오백년 야사, 꿈과희망, 2009, 74쪽).

태종이 하늘에 비를 내리기 위해 목을 바치고 제사를 지냈다는 모습은 드라마 “용의 눈물”의 마지막 장면의 하이라이트로 카타르시스적인 감동의 폭탄이다. 왕의 몸바쳐 비를 내리고 우리는 그 모습을 보고 감동받으면서 2000년대를 맞이 하였다. 역시 주술의 마력! 그런데 “매년 음력5월 10일이면 어금없이 비가 내린다.”는 사실일까? 관련된 과학자들이 음력 5월10일에 비가 내리는지 연구를 하였다. 오히려 그날은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15세기의 지구는 ‘중세 온난기’를 지나는 중이었다. 그래서 태종부터 성종까지는 상대적으로 기온이 따뜻하였고 농업 생산이 활발했다. 반대로 18세기의 소빙하기에는 기온이 급강하해 기근과 굶어 죽는 백성이 많아서 조선사회가 붕괴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연려실기술의 이야기는 소빙하기 시기인 조선후기 사회에서 기상이변을 해결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담아내어 주술적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고 해석되어도 무방하다.

   
▲ 대통령의 탄핵정국에서 대통령의 헌법 위반에 논의하는 것과 무관한 세월호 사건이 등장하고 성생활과 관련한 대통령의 사생활이 논의된다./사진=연합뉴스

“잘되면 제 탓 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우리 속담은 주술적 집단의식을 반영하는 우리의 속담이다. 이러한 집단의식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정치지도자나 최고경영진 등의 조직의 지도자에게 향한 집단피해의식으로 왜곡된 윤리 및 책임을 요구하는 모습으로 남아있다. 다시 말해 경제불황, 사건사고 및 재난에 대하여 우리 사회 지도자들에 주술적 책임을 묻는 집단무의식이 아직도 무의식 깊숙이 남아있다.

현재 대통령의 탄핵정국에서 대통령의 헌법 위반에 논의하는 것과 무관한 세월호 사건이 등장하고 성생활과 관련한 대통령의 사생활이 논의된다. 과거 왕이 중 왕비의 성적 요구를 맞추지 못하면 왕을 죽여버린 관습과 유사성이 있다.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영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다. 대기업 총수를 국회에 불러내어 큰 소리로 호통치고 삿대질한다. 국회의원들은 대기업 총수들에게 인격적으로 살인행위를 서슴치 않고 한다. 대기업 총수가 공개적으로 욕 먹는다고 해서 국민들이 기분이 좋을 지는 모르겠지만 실질적 이득은 전혀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즐겨야만 한다. 많은 사람들은 대기업 총수를 존경하고 대기업에서 취업하고 싶어한다.

대기업 가문의 사생활은 연예인 기사와 동급으로 다루어 진다. 사람들은 패션에 관심을 두고 결혼, 이혼, 이혼 및 혼외정사 등이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다. 그러다 꼬투리를 잡을 일이 생기면 그들을 인격 살인을 하고 만다. 흰머리가 희끗하고 나이가 연로한 대기업 총수들을 국회에 끌어내어 나이 어린 국회의원들이 총수들에게 큰 목소리로 겁주고 협박을 한다. 국민들은 종편을 통하여 지켜보면서 속이 시원한 사이다 발언을 하는 마타도어 (투우사)라고 칭찬한다. 종편의 평론가들은 더 가관이다. 

젊은 세대는 주술에서 자유로운가? 아니다. 인문학을 전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방송과 인터넷에 등장하여 “힐링”을 한다고 한다. 유력 대선 주자조차 토크 콘서트라고 이름을 내걸고 “힐링”을 한다고 한다. “힐링”이야 말로 고대 사화의 주술의 핵심이다. 동시에 이러한 주술은 결과가 나쁘면 폭력으로 돌변하는 위험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런데 서구사회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존재한다. 영국왕실의 다이애나 비는 이러한 주술적 관심으로 사망하였다. 그러나 서구사회의 엘리트 지도자들을 이러한 집단의식의 광기의 위험성을 잘 인지하고 있다. 지난 세기 히틀러의 광기를 체험하였기에 적어도 사회지도층은 대중의 주술적 집단의식을 적절하고 통제하고 이를 이용하려는 것을 경계한다. 
결론적으로, 주역은 중국의 최고 고전이고 중국의 정신의 정수를 담은 서적이다. 고대 4대문명 중 인더스, 이집트, 및 메소포타미나 문명은 멸망하여 현대 문명과 단절되었다. 하지만 중국 황하 문명은 초기부터 단절없이 문명이 지속되어 왔다. 다시 말해 고대적 농본적이고 주술적인 요소가 강하게 남아있다.

서구 국가의 역사교과서는 자신들의 근현대사부터 출발한다. 이에 반해, 동북아 국가들은 고대사를 가지고 역사전쟁을 벌이고 있고, 자신들의 역사가 5000년이상이라고 가르친다. 공식적으로 고대 사회의 연계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전근대적인 주술에서 탈피하지 못하였고 주술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사회공동체의 안정과 번영을 지도자에게 위임함과 동시에 위험을 동반 (risk-taking)하는 의사결정도 위임한다. 그리고 단 물은 빨아 먹고 쓴 물은 뱉으면서 지도자를 살해하는 집단무의식의 원형의 포로로 잡혀있다. 이러한 주술에 빠져 있다면, 지금의 경제적 풍요와 민주적 성과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하여야 한다. /한영수 서강대 연구교수


(이 글은 8일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결국은 경제다! 경제살리기’ 연속세미나 3차 『주술적 집단의식이 경제를 망친다』에서 한영수 교수가 발표한 발제문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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