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용구 소설가·정신과전문의
이념의 전선이 판치던 시절,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입적해 키우며 진정한 용서의 길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준 목회자 손양원. 분열과 갈등, 증오로 치닫는 이 시대에 그가 던지는 울림은 감동을 넘어 가슴 묵직한 과제를 던진다. 미디어펜은 소설가이자 정신과 전문의인 신용구 원장의 '소설 손양원:용서'를 연재한다. 소설을 통해 진정한 용서와 화해 그리고 우리사회의 병폐인 갈등과 증오를 치유하는 길을 묻는다. 필자인 신 원장은 용서의 의미를 새삼 일깨워준 손양원 목사님께 감사를 드리고, 독자들 역시 손양원 목사의 인생을 통해 용서의 진정한 의미를 가슴에 한번 되새겨 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편집자 주]

   

귀천 5·6

5   

학교 당국에서는 학내외의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정부로부터 이미 용서를 받은 일이기 때문에 박태수의 일을 더 이상 문제를 삼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었으나, 학생들은 학교의 미온적인 대처에 반발하며 박태수에 대한 강력한 조치를 학교 당국에 계속 요구하고 있었다. 박태수가 학교의 얼굴에 먹칠을 했으니,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킨 인물에 대해 제적 조치를 하라는 것이었다. 

이 같은 소란 때문에 태수는 사건 이후 학우들의 눈을 피해 줄곧 기숙사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곡기를 끊은 지도 이레나 되었다.  

운서는 두문불출하고 있는 태수의 상태가 걱정이 되어 오전 강의를 마치고 기숙사에 잠시 들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볕도 들지 않는 구석에 코쿤 속의 누에처럼 몸을 웅크린 채  앉아 있는 태수의 수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밥은 먹었냐?" 
"......"

운서의 물음에 그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고, 운서는 그 앞에 빵 하나를 내밀고는 쭈뼛거리며 그의 눈치를 보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희자가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하더라......"
"....." 

여전히 태수는 고개를 수그린 채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내가 주책없이 쓸데없는 소리를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운서의 말에 그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아니야, 잘했어, 고마워"

태수는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미안해하는 그에게 상긋 웃어 보이기까지 했지만, 이내 그의 눈자위가 봉숭아물이 든 손톱처럼 붉게 물들고 있었다. 사색이 되어 돌아가던 그녀를 보면서 예상을 했던 일이었지만, 태수는 그녀가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소식에 하늘이 무너지듯 눈앞이 캄캄했다.  

얼이 빠져 있는 태수의 얼굴을 보니 자신이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아 운서는 그에게 몹시 미안했다.

"술이나 한잔 할래?"

술을 아주 좋아하는 운서였지만, 뜨거운 청춘의 쓰라린 상실감을 달래주는데 약이 될 만한 것으로 술 외에는 달리 운서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운서의 말에 태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서는 그를 데리고 영도다리를 건너 자신들이 단골로 삼고 있던 남포동 뒷골목의 코딱지만 한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훤한 대낮인데다 가게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아 손님은 없었다. 이들이 들어가자 주모는 이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눈웃음을 한번 치고는 금방 고등어에다 양념을 해서 석쇠에 구워낸 고갈비와 막걸리 한 되를 내어놨다. 고갈비와 막걸리는 이들이 단골 메뉴였다. 운서는 늙은 주모가 내어 온 막걸리를 사발 가득 채운 후 태수에게 건넸다. 

"태수야, 지금은 딴 생각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오로지 이 주님만 모시자, 알겠제?"

그의 말에 태수가 씁쓸한 웃음을 입가에 희미하게 띠면서 자신의 눈물을 삼키듯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잔을 다 비웠다.

"고맙다, 운서야."
"태수야, 좀 힘들긴 하겠지만 이제 지나 간 일은 잊자, 그라고  빨리 수업 들으러 가자"
"내가 공부를 할 수 있겠나?"

운서는 태수의 생각이 어림도 없다는 듯 정색을 하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와? 네가 와 공부를 못하노?"  
"벼룩도 낯짝이 안 있나......"
"쓸데없는 생각 마라, 털어서 먼지 안 날 사람 세상에 어데 있노? 그라고 다 지난 일이고 학교에서도 더 이상 문제를 삼지 않겠다고 했는데, 와 니가 자꾸 더 난리고!"

그의 말에 태수가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 그랬다, 내가 저지른 일을 어떻게 그냥 먼지에 비할 수 있겠냐? 생각할 게 많아, 꼭 학우들 이목 때문만도 아니야, 벌레 보듯 하는 친구들의 눈빛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이니 피할 생각 없어, 당연히 짊어져야지, 어차피 내가 진 멍에니까. 하지만 지금 더 고통스러운 것은 내가 신학을 공부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야, 공부의 목적을 잃어버린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내가 잠시 동안 착각하면서 내가 내 자신을 잊고 있었다는 거야, 난 아주 뻔뻔한 놈이었어, 동인·동신이 형제를 죽여 놓고도 난 그때의 일을 까맣게 잊고, 사람들 하고 웃고 떠들고 농담도 하고 데이트도 하고, 아주 형편없는 인생을 살고 있었던 거야, 내 양심을 속이고 살았던 놈이 어떻게 목사가 될 수 있겠어? 너 같으면 가능하다고 생각하니?"

운서는 태수가 얼마나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고 있는지 알고 있어 더 이상 그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고, 그의 아픈 기억과 상처를 걷어내고 지우듯 술을 그의 잔에다 자꾸만 채웠다. 

어느덧 밤 열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독일병정처럼 똑바로 앉아 있던 그들도 바닥을 드러낸 술과 함께 의식이 늘어지고 있었다.

"야, 운서야, 나 정말 죽고 싶은데, 죽을 수가 없다."
"술값 아깝구로 와 또 씰데없는 소리 하고 있노?"

운서는 그의 소리가 듣기 싫어 버럭 성을 내었지만, 태수는 고개만 흔들었다.

"쓸데없는 소리가 아니지, 정말 쓸데없는 소리가 아니야, 내겐 내 인생이 없어, 난 내 인생을 저당 잡혔거든, 허허!"

태수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술잔을 비우자, 누군가 그의 술잔에 술을 부어 잔을 채워주었다.

"아, 아버지!"

외로운 등대의 불빛처럼 술에 취해 정신이 깜빡거리던 태수와 운서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박태수에게 술을 따른 이는 뜻밖에도 그의 양부(養父)인 손양원이었다.

"어떻게......?"
"학장님이 너 때문에 전보를 쳐서 왔다, 기숙사 갔더니 친구들이 아마 여기에 있을 거라고 가르쳐주더구나."  
"죄송합니다."

손양원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들의 등을 두드리고는 자신도 술을 청했다.

"이 아비한테도 한잔 따라봐!"

손양원은 아들이 부어 준 술로 입술을 적신 후, 운서에게 양해를 구해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부자간의 짧은 시간을 가졌다.

"이 아비한테 인생이 저당 잡혔다고 말하는 걸 보니까, 이 아버지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거 같구나, 태수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봐."
"......"  

태수는 아버지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눈물만 흘렸다.

"말해보라니까? 사내 녀석이 못나게 눈물만 흘리고 있어!"

아버지의 채근에도 태수는 여전히 눈물을 그치지 않았고 그간 쌓여왔던 설움이 북받쳤던지 이젠 어깨까지 들썩이며 흐느끼다가 끝내는 울먹이며 하소연을 했다.

"아버지, 차라리 그 때 절 죽게 내버려두시지 왜 저를 살려주셨어요? 그랬으면 이처럼 괴롭진 않았을 텐데요!"

손양원은 원망 섞인 넋두리를 쏟아내며 자신의 품에 안겨오는 아들의 커다란 등을 도닥이며 그 역시 눈물을 지었다.

'주여, 짐을 주시려거든 이 아이가 질 수 없는 짐은 그에게 주지마시고 부디 그 짐을 저에게 주시옵소서.'

   
▲ 영화 '포화속으로' 스틸 컷.

6

태수가 학교를 그만둔 지 한 달 만에 전쟁이 터졌다. 작년 이맘때 미군이 철수하고 올 정월에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의 애치슨라인 선포로 한반도가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제외되면서 어느 정도 위기가 예견은 되었지만, 이 같은 전면적인 북한의 공격이 있을 것으로는 전혀  예상을 하지는 못했던 터라, 탱크를 앞세우고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 인민군에게 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해 계속 남쪽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결국 신생 대한민국은 개전 1개월 만에 국토의 80퍼센트 이상을 적에게 내주었고 7월말에는 전라도 여수까지 적의 수중에 들어갈 지경이 되자 신풍리 주민들도 서둘러 피난길에 올랐다.

"조심해서 오르세요."

손양원은 포구에 모여 승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일부 애양원 식구들과 신풍리 주민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면서 피난길에 오르는 그들의 무거운 마음을 다독였다. 짐을 이고 진 사람들이 모두 다 배에 오르고 이제 마을 앞 작은 포구엔 손양원 혼자 남았다.

"아버지, 빨리 올라오세요."

손양원의 식구들과 함께 배에 먼저 오른 박태수가 포구에 있는 아버지를 향해 손짓을 했다.

"태수야, 난 안 간다, 식구들 잘 부탁한다, 알았지!"

배에 오른 사람들을 확인하고 출발준비를 마친 박태수가 깜짝 놀라 소리를 쳤다.

"아버지 무슨 말씀이세요?"
"애양원 식구들이 다 남아 있는데 그 양반들을 두고 내가 어찌 혼자 떠날 수 있겠냐? 난 여기서 그 양반들하고 같이 있을 거야."
"아버지, 위험해요, 그놈들은 목사라면 미국 앞잡이로 알잖아요? 빨리 올라오세요, 어서요!"
"아니야, 난 이 곳에 남아 있어야 해."
"아버지가 안 가시면 저도 안 갑니다."

손양원의 갑작스런 잔류 선언에 놀란 박태수가 배에서 뛰어내릴 듯 갑판으로 걸어 내려오면서 떼를 쓰듯 어깃장을 놓으려 했지만, 손양원의 말 한마디에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무슨 소리야, 이놈아, 어머니가 만삭인데 장남인 네가 어머니를 돌보지 않으면 누가 돌봐?" 

두 아들을 잃은 지 일 년 만에 손양원 부부는 새로운 아기를 갖게 되었고, 지금은 임신한지 7개월이 넘어 양순씨의 배가 산만큼 불러 있었다.

간밤에 이미 손양원은 아내 양순씨에게 자신은 이곳에 남아 애양원 식구들을 지키겠다는 뜻을 전한 터라, 부자간의 설전에도 갑판에 앉은 양순씨는 나서지 못하고 막내딸의 손을 잡은 채 입을 꼭 다물고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속으로 삼키고 있었다. 양순씨에게 남편 손양원은 예수와 애양원 식구 밖에 모르는 참으로 비정한 사내였다.

"어찌 하실려고 그러세요? 그놈들이 얼마나 악독한 놈들인지는 지난 번 폭동 때 다 봤잖아요?"
"여보, 그거 내가 몰라서 그러는 거 아니란 건 당신이 잘 알지 않소, 난 이미 옛날에 죽었던 몸이요, 주기철(주: 손양원과 함께 일본 식민지 시절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벌이다 옥사한 장로교 목사) 형도 죽지 않았소, 죽어야 당연했던 몸이 주님의 은혜로 살아서 감옥을 나왔는데, 이 덤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 무엇이 아까워서 이곳에서 도망을 치겠소, 그리고 굳이 내가  피난을 해야 한다면 주님의 품안으로 피난하는 것이 옳지 않겠소?"

남편의 고집과 신념을 알아 양순씨는 눈물을 흘리며 남편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녀에게도 인생은 어차피 한번 뿐인 인생이라 아깝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두 아들을 순교의 제단에 바친 후로 그녀 역시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린 터였다.

하지만 막상 뱃고동 소리가 울리며 배가 포구를 떠나려고 하자 억지로 누르고 있던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것이 이승에서 남편을 마지막으로 보는 순간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생각이 퍼뜩 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불룩 솟아나온 배를 움켜쥔 채 큰 아들 박태수가 서 있는 뱃머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녀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자신도 모르게 포구에 서 있는 남편을 향해 외쳤다. 

"여보, 우리 천국에서 만나요."
"그래요, 우리 천국에서 봅시다."

배가 포구에서 점점 멀어져 가족들의 눈에 손 목사의 모습이 희미한 점처럼 보일 때 쯤 되어, 천지를 격동시키는 비행기 굉음에다 대포 소리가 빗발치듯 쏟아져 결국 가족들은 놀란 가슴을 서로 부둥켜안고 목 놓아 울음을 터뜨렸다. <계속> /신용구 소설가·정신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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