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박재훈 기자]글로벌 제약·바이오 신약 파이프라인이 30년 만에 처음 줄어들었다. 숫자만 늘리던 시대가 끝나고 비효율 과제 정리와 선택·집중을 요구하는 ‘질적 전환’의 신호탄이라는 해석이 업계에서 나온다.
13일 글로벌 헬스케어 시장조사기관 시티라인의 2026 약품 R&D(연구개발) 연간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초 기준 전 세계 개발 중 신약(파이프라인) 수는 2만2940개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2만3875개에서 3.9% 줄어든 수치로 1990년대 중반 이후 매년 증가하던 파이프라인이 처음으로 감소세로 전환했다.
◆코로나 기점으로 바뀌는 흐름…효율화·바이오 부상
2001년 5995개 수준이던 개발 파이프라인이 2025년까지 24년 연속 늘어난 점을 감안하면 이번 감소는 제약·바이오 산업의 투자·R&D 전략이 구조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신호로 읽힌다.
보고서는 이번 감소에 데이터 수집 방식 변경으로 인한 기저효과도 일부 반영돼 있다고 설명하면서도 최근 3년간 파이프라인 증가율이 이미 둔화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2023년에서 2024년으로 넘어가는 구간에서는 파이프라인은 7.2% 늘었다. 하지만 2024년에서 2025년에는 증가율이 4.6%로 떨어졌고 2025년에서 2026년에는 하락으로 돌아섰다.
팬데믹 이후 조달된 쉽고 저렴한 투자금이 빠져나가고 투자자들이 효율성과 상업성에 더 민감해지면서 수익성이 낮은 후보물질과 중복 과제가 대거 정리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질환별로도 구조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종양 파이프라인은 9476개에서 9036개로, 희귀질환도 7721개에서 7618개로 줄었다. 반면 면역질환은 20% 이상 증가했고 심혈관·혈액질환도 확대됐다. 특히 비만·대사질환은 GLP-1 이후 후속 후보물질이 집중되며 약 30% 증가했다.
모달리티 측면에서는 항체, ADC(항체약물접합체), 세포·유전자치료제 등 바이오의약품이 처음으로 저분자 의약품을 앞질렀다. 고비용·고난도 영역이지만 차별화 가능성이 높아 자원이 집중되는 양상이다.
글로벌 제약사들도 포트폴리오 슬림화에 나섰다. 로슈는 262개로 1위를 유지했고 아스트라제네카는 확대 전략으로 2위에 올랐다. 반면 화이자는 파이프라인을 줄이며 순위가 하락했다. 대형사들조차 면역·대사·바이오 중심으로 자원을 재배치하는 모습이다.
◆글로벌은 축소, 한국은 상승?…양적 경쟁 착시 주의해야
한국의 위치는 다소 상반된 흐름이다. 2025년 기준 한국의 글로벌 신약 파이프라인 점유율은 약 6% 수준으로 일본(4%)을 제치고 3위에 올랐다. 미국과 유럽이 성장률 둔화를 겪는 사이 최근 3년간 한국 파이프라인 증가율은 17%에 달해 중국(27%)에 이어 2위를 기록해 증가율도 빠르다.
국내 증권가와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평가가 엇갈린다. 글로벌 탑티어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R&D 파이프라인 저변이 넓어졌다는 신호로 해석하는 반면 일각에서는 상장 바이오 기업들의 IR 자료에서 여전히 ‘파이프라인 개수’와 ‘적응증 숫자’를 전면에 내세우는 관행을 지적하고 있다.
유럽 등 일부 시장에서 바이오시밀러는 이미 허가 후보가 바닥나 파이프라인 공백이 거론되고 있으나 한국은 적응증만 쪼개 파이프라인 숫자를 부풀리는 식의 양적 경쟁에 머물고 있다는 비판이다.
글로벌 자본시장 환경이 녹록지 않다는 점도 변수다. EY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전 세계 바이오텍의 3분의 1 이상이 1년 미만의 현금만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팬데믹 시기 급증했던 바이오 상장·딜 사이클이 꺾이면서 구조조정과 파이프라인 축소가 뒤따랐고 ‘기술이전 가능성’이 낮거나 임상 리스크가 큰 과제들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이 같은 현상은 국내 기업들도 마찬가지로 영향을 주고 있다. 실제로 상장 이후 추가 증자·라이선스 아웃(L/O)에 실패한 일부 기업들은 임상 중단·연구 인력 감축을 발표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이제는 파이프라인이 몇 개인지가 아니라 어떤 모달리티로 어느 단계까지 검증됐고 상업화 전략이 얼마나 구체적인지로 평가 기준이 바뀌고 있다”며 “글로벌이 숫자를 줄이며 효율성 경쟁으로 가는 상황에서 한국 기업들도 파이프라인 슬림화, AI(인공지능) 기반 후보물질 선별, 초기부터 CDMO(위탁개발생산)·상업화 파트너를 염두에 둔 설계가 없으면 투자자들의 선택을 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미디어펜=박재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