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석원 문화미디어 전문기자] 17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내 아트하우스 모모에 모인 취재진과 관객들의 객석은 순간 숙연해졌다. 화면 너머에서 들려오는 시리아 출신 하산 카탄 감독의 나직한 목소리에는, 통계학적 수치나 정치적 논쟁으로 재단할 수 없는 한 인간의 처절한 삶의 궤적이 묻어났다.
올해로 10회째를 맞이하며 ‘난민들의 축제’라는 슬로건을 내건 난민영화제 기념 상영회 및 미디어 토크 세션 현장은, ‘난민’이라는 거칠고 차가운 단어 뒤에 가려진 진짜 인간들의 얼굴과 마주하는 뜨거운 성찰의 공간이었다.
휴대전화에 담긴 1년의 기다림, ‘피난의 동지들’이 전한 먹먹한 공포
17일 제10회 난민영화제가 개막해 하산 카탄 감독의 '피난의 동지들'이 상영된 후 GV가 열렸다. /사진=난민영화제 제공
이날 현장에서 상영된 단편 다큐멘터리 '피난의 동지들(Allies in Exile)'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메가폰을 잡은 하산 카탄 감독은 사실 국제사회에 시리아의 비극을 알리는 데 앞장서 온 베테랑 영화인이다. 오스카 수상 다큐멘터리 '화이트 헬멧'(2016)과 에미상 후보에 오른 '라스트 맨 인 알레포'(2018)에 참여했던 그였지만, 정작 고국 알레포의 참상을 카메라에 담다 잠시 방문한 영국 런던에서 발이 묶이며 스스로 ‘망명자’가 되었다. 가족과 함께 피난했던 튀르키예로의 입국마저 거부당하면서,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패디 알 할라비와 함께 런던의 한 난민 숙소에서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영화는 2024년, 영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한 뒤 1년 가까이 하염없는 기다림과 두려움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두 청춘의 일상을 카탄 감독이 직접 기록해 낸 40분짜리 다큐멘터리다. 내일의 운명을 알 수 없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카탄 감독은 카메라를 내려놓지 않았다.
상영이 끝난 후 동영상 메시지를 통해 취재진과 만난 카탄 감독은 “왜 난민이 되기로 선택했냐는 질문을 참 많이 받는데, 난민은 결코 선택이나 꿈꿔온 삶이 아니다”라며 선을 그었다. 그는 “뉴스나 미디어는 난민을 그저 숫자와 표, 통계, 혹은 정치적 논쟁의 대상으로만 이야기하지만, 내가 숙소에서 본 이들은 저마다 탁월한 재능이 있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으며, 그저 단 한 번의 기회를 바라는 용감한 인간들이었다”고 일갈했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 역시 자신의 고통과 두려움, 상실감을 고스란히 마주해야 하는 힘겨운 싸움이었지만, 역설적으로 그 창작의 과정이 무력한 시간을 버티고 살아남게 해 준 힘이었다고 그는 고백했다.
창작의 자유 보장하는 DFF, 그리고 든든한 파트너 유니클로의 동행
카탄 감독이 절망의 한가운데서 이토록 빼어난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디스플레이스먼트 필름 펀드(DFF)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DFF는 분쟁이나 탄압으로 인해 강제 이주당한 상황에서도 예술적 끈을 놓지 않는 감독과 제작자들을 돕기 위해 로테르담국제영화제(IFFR) 산하 후버트 발스 펀드가 2025년 설립한 국제 영화 제작 펀드다.
GV에 참석한 이일 난민네트워크 의장(왼쪽)과 야나이 코지 패스트리테일링 그룹 수석 집행 임원(가운데), 그리고 클레어 스튜어트 DFF 운영 총괄. /사진=난민영화제 제공
이날 마이크를 잡은 클레어 스튜어트 DFF 운영 총괄은 “지난해와 올해 각각 5편의 작품을 선정해 10만 유로(약 1억 7000만 원)의 제작 지원금을 지급했다”고 밝히며, “난민을 다룬 작품은 늘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편견이 있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듯 그들의 삶 속에도 일상과 우정이 존재한다. 어떤 직업을 가졌든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임을 보여주고, 장르적 다양성을 확보해 주류 영화계로 진입시키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펀드의 취지를 설명했다.
DFF는 시놉시스 통과 후 창작의 자유를 철저히 보장하기 위해 제작 과정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가치 있는 여정에 20년 넘게 난민 지원 활동을 펼쳐온 유니클로가 설립 파트너로 동행했다. 유니클로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10만 유로를 후원하며 난민 예술가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현장에 참석한 유니클로의 모기업인 패스트리테일링 그룹의 야나이 코지 수석 집행 임원(지속가능경영 부문 총괄)은 “2023년 스위스 글로벌 난민 포럼에서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이자 DFF 공동 설립자인 배우 케이트 블란쳇을 만나 공감대를 형성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비화를 밝혔다.
야나이 임원은 “긴급 구호나 의류 기부를 넘어 ‘영화 투자’라는 새로운 방식을 택한 이유는, 사람의 사고방식을 가장 쉽고 강력하게 바꿀 수 있는 매체가 바로 영화이기 때문”이라며, “재능 있는 난민 창작자들이 목소리를 키우고 창의성을 펼칠 수 있도록 유니클로가 주류 사회로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겠다”고 강조했다.
옷을 통해 전하는 평화의 메시지, 일상에서의 연대로 이어지다
17일 이화여대 내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개막한 제10회 난민영화제. 이번 영화제의 슬로건은 '난민들의 축제'다. /사진=난민영화제 제공
유니클로는 일상 속에서 평화를 실천할 수 있도록 기획된 자선 티셔츠 프로젝트 ‘PEACE FOR ALL(모두를 위한 평화)’을 제작했다. 2022년부터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올해 4월 말 기준 전 세계 누적 판매량 1046만 장을 돌파하고 약 295억 원의 기부금을 조성하는 등 전 세계 피해자들을 돕는 실질적인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오는 19일에는 난민 출신 배우 키 호이 콴, 영화감독 소피아 코폴라, 그리고 DFF가 직접 디자인에 참여한 신규 티셔츠 5종이 출시를 앞두고 있다. 이 중 DFF 티셔츠의 판매 수익은 해당 펀드로 직행해 또 다른 난민 영화인들의 제작 지원금으로 쓰이게 된다.
야나이 코지 임원의 “평화를 바라는 마음은 특별한 계기가 아니라 일상의 선택과 행동 속에서 피어난다”라는 말처럼, 관객들이 극장에서 느낀 감동을 일상에서 옷을 입는 행위를 통해 연대로 이어가게 만드는 영리하고도 따뜻한 순환 구조였다.
누구도 원치 않았으나 마주해야 했던 비극, 그러나 그 비극 속에서도 카메라를 들고 인간의 존엄을 증명해 낸 예술가들. 제10회 난민영화제는 단순한 상영회를 넘어, 스크린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내 일상으로 가져와 이해하고 연대하는 거대한 문화적 움직임의 현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