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석원 문화미디어 전문기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은 캐스팅 소식은 물론 예고편의 한 장면이나 포스터 한 장을 두고도 설왕설래가 오가는 화제작이 된다. 관객들은 '인셉션'(2010), '인터스텔라'(2014) 등 전작으로 대표되는 놀란 감독 특유의 웅장한 스케일과 압도적인 영화적 체험에 큰 기대감을 갖고 영화관을 찾기 마련이다.
신작 '오디세이'는 그런 기대감을 십분 충족하고도 남는 영화다.
'오디세이'는 기원전 8세기에 쓰인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원작으로 한다. 트로이 목마 작전을 이끈 영웅 오디세우스(맷 데이먼 분)가 전쟁에서 이긴 뒤 고향인 이타카 왕국으로 돌아가기까지 20년에 걸친 잔혹한 여정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전작 '오펜하이머'(2023)가 최악의 살상 무기인 원자폭탄을 만들었다는 죄의식을 다뤘다면, '오디세이' 역시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지략가의 참회와 고뇌가 깊게 깔려 있다. 놀란 감독은 신화의 낭만을 걷어내고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 보며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영웅 오디세우스를 연기한 맷 데이먼은 마치 이 영화를 위해 그 동안 연기를 한 것처럼 느껴질 만큼 오디세우스에 몰입했다. / 사진=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영화는 트로이 전쟁의 생생한 모습과 척박한 귀향길, 그리고 이타카 왕국에 남겨진 모자가 겪는 씁쓸한 상황을 자연스레 교차해 보여준다.
오디세우스의 부재가 길어지자 이타카는 왕비 페넬로페(앤 해서웨이)와 결혼해 빈 왕좌를 노리는 구혼자들로 혼란에 빠지고, 갓난아기 때 아버지와 헤어진 왕자 텔레마코스(톰 홀랜드)는 무력감 속에서 성장의 진통을 겪는다. 놀란 감독은 거대한 모험만큼이나 남겨진 사람들의 시간을 비중 있게 들여다보며 신화를 철저히 현실 위에 세웠다.
배우들의 열연은 '오디세이'의 품격을 한 단계 높여준다. 특히 주인공 오디세우스를 연기한 맷 데이먼은 마치 이 한 편의 영화를 위해 그동안 배우 생활을 해온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찬사가 아깝지 않은 인생 연기를 펼친다.
신들에게조차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패기와 병사들을 아끼는 지략가의 면모, 그리고 트로이 목마 작전 이후 벌어진 끔찍한 살육의 현장에서 느끼는 인간적인 고뇌까지 오디세우스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완성했다. 영웅이기에 강한 것이 아니라 상처를 안고도 끝내 포기하지 않기에 강한 인물이라는 점을 묵직하게 증명한다.
가장 정적인 연기를 보여준 앤 해서웨이와, 영웅인 아버지를 완성하는 아들의 모습을 잘 묘사한 톰 홀랜드의 연기도 이 영화를 만들어내는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사진=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장대한 스케일이라는 수식이 현실로 느껴질 만한 이 영화는 CG를 최소화해 오히려 더 특수한 느낌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사진=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앤 해서웨이가 연기한 페넬로페 역시 20년의 세월을 견디는 과정을 절제된 감정으로 채워 넣는다. 구혼자들을 경멸하면서도 감정을 억누르는 그녀의 기다림은 수동적인 인내가 아니라 왕국을 버티게 한 또 하나의 투쟁이다. 페넬로페가 느끼는 분노와 슬픔은 구구절절한 대사보다 떨리는 얼굴 근육과 눈빛으로 더욱 선명하게 전달된다.
여기에 매혹적이면서도 기묘한 존재감을 발산하는 샤를리즈 테론(칼립소 역), 표정만으로 신비로운 여신의 분위기를 만드는 젠데이아(아테나 역), 야심 차고 비열한 악역으로 변신한 로버트 패틴슨(안티노오스 역), 짧은 분량에도 남다른 인상을 남긴 엘리엇 페이지(시논 역)까지 초호화 배우진이 극의 밀도를 가득 채운다.
영상미와 연출 기법 또한 신비에 가깝다. 컴퓨터그래픽(CG)을 최소화하는 '아날로그 리얼리즘' 연출관을 이어가는 놀란 감독은 예술혼에 가까운 집념을 보여준다.
영화 역사상 최초로 전편을 IMAX 70mm 필름 포맷으로 촬영했고, 91일간의 촬영 기간 동안 총 210만 피트(약 640km)에 달하는 필름이 사용됐다. 모로코, 그리스, 이탈리아, 아이슬란드, 스코틀랜드 등 실제 로케이션 촬영이 만든 압도적인 질감은 자연 자체를 신화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실존의 이야기로 할리우드에서 가장 뛰어난 서사를 구사했던 놀란 감독은 이번에는 신회의 이야기로 가장 인간적인 영웅 서사를 만들어냈다. /사진=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실제 바다 위에서 나무로 만든 배를 띄우고 거대한 수조에 제트 엔진을 동원해 폭풍우를 연출하는가 하면, 캄캄한 밤 횃불에 의지해 싸우는 청동기 시대의 전투는 격렬한 긴장감을 부른다. 여기에 고대 악기인 리라와 아울로스를 활용한 루드비히 고란손 음악감독의 사운드는 고대인의 감각을 극장에서 직접 체험하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OTT 플랫폼이 주류가 된 시대에 "왜 우리는 여전히 극장에 가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놀란 감독이 내놓은 가장 이상적인 답이자 완벽한 마스터피스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다.
다만, 작품에 대한 극찬과 별개로 한국 시장에서의 흥행 성적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의문표가 남는다.
첫째는 172분, 즉 3시간에서 8분 빠지는 긴 러닝타임의 부담감이다. 하루 상영 회수가 적어지는 물리적 한계는 물론, 영화에 몰입하는 3시간 가까운 시간은 역으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타이트하게 조여오는 긴장감이 돼 한국 관객들에게는 피로감이나 압박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시원시원한 전개와 악당을 향한 통쾌한 응징을 기대하는 일반적인 할리우드 액션물과 달리, 보는 내내 관객의 숨통을 조이는 오디세우스의 고통스러운 모험이 대중성을 얼마나 확보할 지가 관건이다.
둘째는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소재에 대한 문화적 체감 온도 차이다. 미국이나 유럽 등 서구권에서는 어릴 때부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야'를 거의 성경 다음으로 친숙하게 접하지만, 한국 관객에게 그리스 영웅 서사는 아주 매력적인 흥행 소재가 아닐 수 있다.
거대함에 맞서는 인간의 더 거대한 이야기를 그린 '오디세이', 과연 한국의 영화 팬들은 어떻게 이 영화를 대할 지 지켜볼 일이다. /사진=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실제로 2004년 개봉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원작으로 한 영화 '트로이' 역시 브래드 피트와 에릭 바나, 올랜도 블룸 등 화려한 캐스팅과 북미의 폭발적 흥행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196분이라는 긴 러닝타임과 소재적 한계 속에 380만 명 관객에 그친 바 있다.
'오디세이'는 "인간의 본성은 바닥에서 나온다"는 대사처럼 신화의 외피를 두른 채 인간의 선택과 인내를 묻는 거대한 드라마다. 작품성만큼은 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정점에 섰다고 평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신과 맞서는 한 인간이 그 고통과 엄혹함을 이겨내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서사는 놀란 감독과 맷 데이먼이 빚어낸 위대한 영웅 서사다. 그것을 이야기가 아닌 장대한 스케일의 영화로 만들어냈다는 것만 해도 찬사를 받을 만하다
하지만 과연 그 위대한 작업이 어떤 숫자로 평가받을 수 있을까? 놀라운 172분이 오히려 압박감으로 작용하고, 위대한 영웅 서사가 낯선 소재의 장벽이 될 지, 아니면 결국 그것을 극복한 또 다른 영웅담이 돼 한국 관객들의 마음까지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을 지는 개봉 후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