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동하 기자] 국내 배터리 업계가 전기차 캐즘(수요 정체)으로 둔화한 업황을 돌파하기 위해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 진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확산과 재생에너지 확대에 따른 전력망 안정화 요구가 맞물리면서 ESS가 정체된 배터리 산업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27일 업계에 따르면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최근 재생에너지 출력 변동성을 AI가 예측해 ESS를 제어하는 지역 실증 모델인 ‘AI 활용 ESS 구축 지원사업’의 최종 선정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사업은 향후 전력망 운영을 좌우할 핵심 인프라의 주도권을 판가름할 분기점으로 평가받으며 배터리 업계의 관심을 모았다.
오는 9월 1조 원 규모의 ‘제3차 ESS 중앙계약시장 입찰’을 앞두고 국내 배터리 3사(삼성SDI·LG에너지솔루션·SK온)의 주도권 경쟁이 본격화됐다. 전력거래소 주도의 대규모 본입찰을 앞두고 각 사의 기술 경쟁력을 입증할 사전 레퍼런스라는 점에서 업계의 시선이 집중된다.
국내 배터리 업계가 전기차 캐즘(수요 정체)을 돌파하기 위해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으로 전장을 빠르게 넓히고 있다./사진=제미나이
◆ 삼성이 다진 ‘하드웨어 독주’에 LG·SK 반격
최근 기후에너지환경부가 발표한 사업 결과는 각 사의 차별화된 시장 접근법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하드웨어 공급 측면에서는 삼성SDI의 강세가 독보적이었다. 최종 선정된 9개 사업자 중 6곳이 삼성SDI의 배터리 셀을 채택했으며 용량 기준 공급 물량은 전체의 66%(420MWh)에 달했다. 삼성SDI는 배터리 셀·모듈·랙·안전시스템 등을 컨테이너에 통합한 솔루션 ‘SBB(삼성배터리박스) 1.5’를 전면에 내세워 고에너지 밀도와 화재 안정성 측면에서 기자재 밸류체인의 신뢰도를 입증했다. 앞선 1·2차 중앙계약시장 누적 점유율에서도 55.8%로 선두를 달리고 있는 만큼 하드웨어 공급망에서의 초기 레퍼런스 선점 효과를 안정적으로 이어갔다.
LG에너지솔루션은 단순 제품 납품을 넘어 소프트웨어 기반의 플랫폼 운영 능력을 확보하는 실리를 택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신한자산운용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단일 사업자 기준 최대 규모인 7개 배전선로(140MWh)의 운영권을 확보했다. 국내 배터리 제조사 중 유일하게 AI 예측 알고리즘 기반의 가상발전소(VPP) 플랫폼 운영 전권을 쥐게 되면서 향후 전력 제어 시장의 핵심 주도권을 잡을 발판을 마련했다. 공급 물량 자체는 22% 수준으로 밀렸으나 하드웨어를 넘어 소프트웨어 밸류체인으로 영역을 확장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SK온은 확보한 물량(80MWh, 12%) 자체는 적지만, 그룹 차원의 시너지 역량을 다지는 데 집중했다. SK온은 SK이노베이션 및 SK이터닉스 등 그룹 내 에너지·인프라 계열사들과의 유기적인 공조를 바탕으로 실증 레퍼런스를 다지는 데 무게를 실었다. 이러한 그룹 차원의 통합 밸류체인 연계 역량은 대규모 자본과 인프라가 투입되는 향후 대형 프로젝트에서 판도를 뒤집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잠재적 변수로 꼽힌다.
배터리 3사의 ESS 수주 전략 비교./사진=제미나이
◆ 3차 입찰 승패 가를 변수…‘비가격 지표’와 ‘LFP 조달선’
오는 9월 치러질 3차 중앙계약시장 입찰은 2038년까지 총 23GW 규모의 ESS를 구축하는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의 일환으로 올해 하반기 시장 판도를 가를 최대 분수령이다. 이번 본게임의 사업 규모는 이전 1·2차와 비슷한 1조 원 안팎으로 추산되며, 배터리 제조사뿐만 아니라 EPC, 발전공기업, 에너지 플랫폼 기업들이 대거 참여하는 초대형 프로젝트다. 앞선 수주전에서 삼성SDI와 SK온이 각각 우위를 점한 가운데, 이번 3차전은 누적 점유율 확대를 위한 배터리 3사의 자존심을 건 진검승부가 될 전망이다.
이번 본게임의 핵심 변수는 단연 변동된 입찰 제도와 LFP(리튬인산철) 배터리 공급망 대응력이다. 과거 1차 입찰 당시 60%에 달했던 가격평가 비중으로 인해 과도한 저가 경쟁 폐해가 지적되자 정부는 2차부터 가격과 비가격 평가 비중을 50대 50으로 조정한 바 있다. 이번 3차 입찰 역시 단순한 가격 후려치기에서 벗어나 제품의 화재 안전성과 국내 생산 기여도 등 구조적 안정성을 종합적으로 따지는 '비가격 지표'가 당락을 가를 결정적 척도가 될 전망이다.
여기에 글로벌 ESS 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한 LFP 배터리 포트폴리오 구축 현황도 변수다. 현재 국내 오창 공장에서 LFP 배터리를 대규모로 양산 중인 LG에너지솔루션이 조달선 측면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한 가운데 삼성SDI와 SK온 역시 북미 전기차 라인을 ESS용으로 전환하거나 신규 LFP 라인 가동 조율에 속도를 내며 맞불을 놓고 있다. 캐즘 돌파를 위한 각 사의 LFP 양산 능력이 실질적인 수주 성과로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 국내 실증 데이터, 글로벌 패권 전쟁의 ‘핵심 무기’ 된다
배터리 3사가 내수 ESS 시장에 사활을 거는 궁극적인 이유는 글로벌 시장 공략을 위한 '테스트베드' 레퍼런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규제와 중국산 비전기차용 리튬이온 배터리에 대한 관세 인상 기조로 인해 북미 현지에서 K-배터리의 새로운 기회가 열리고 있다. 실제로 자체 대용량 ESS를 생산하는 테슬라조차 폭발하는 북미 현지 수요 대응을 위해 국내 기업들과 조 단위 배터리 공급 계약을 맺는 등 우호적인 시장 환경이 조성됐다.
그러나 하드웨어에 자체 전력 거래 플랫폼을 결합한 테슬라나, 원재료부터 배터리 팩까지 수직계열화를 이룬 중국 CATL 등 글로벌 거물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단순 배터리 납품 체계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다. ESS는 최소 10년 이상 운영되는 장기 인프라인 만큼 전력망과 연계된 실전 AI 제어 데이터와 누적 운영 이력이 해외 수주 경쟁력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국내 실증 사업을 통해 축적한 데이터 신뢰성이 글로벌 패권 전쟁의 성패를 가르는 셈이다.
결국 이번 국내 AI 배전망 실증 사업과 9월에 전개될 1조 원 규모의 중앙계약시장 수주 결과는 국내 시장의 점유율 싸움을 넘어 향후 해외 거대 에너지 시장에서 테슬라와 중국 기업의 독주를 막아설 가장 강력한 기술적 무기가 될 것으로 진단된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최근 AI 데이터센터 확대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전력 안정성 강화를 위한 정부 사업은 배터리 3사 모두에게 놓칠 수 없는 기회"라며 "장기간 대규모로 배터리를 공급해 국내외 ESS 레퍼런스를 확실하게 쌓을 수 있는 만큼 오는 9월 3차 중앙계약시장 입찰이 올해 ESS 시장 판도를 가를 최대 승부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디어펜=김동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