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동하 기자]
중동 정세의 짙은 불확실성으로 촉발된 글로벌 공급망 위기 속에서 정부는 물가 안정을 명분으로 1997년 유가 자유화 이후 처음 '석유 최고가격제'를 도입해 시장에 개입했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당초 이달 말 종료 예정이던 최고가격제와 유류세 인하 조치는 오는 9월 말까지 연장됐다.
장기화된 가격 통제로 국내 석유 시장 구조는 기형적으로 변했다. 7월 3주 차 기준 싱가포르 현물시장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1100원대인 반면 국내 주유소 공급가는 984원 수준으로 국제가격이 10%가량 더 비싼 역전 현상이 굳어졌다. 호르무즈 해협 통항 관련 물류비 및 보험료 상승, 고환율 장기화로 밸류체인 전반의 원가 부담이 급증했지만, 정유사들은 이를 제때 반영하지 못한 채 막대한 출혈을 감내해야만 했다.
결국 본격적인 손실 정산 시점이 다가오며 정책을 주도한 정부와 충격을 흡수한 정유업계 간의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산업통상자원부는 4조2000억 원 규모의 목적 예비비를 편성해 '최고액 정산위원회'를 가동했다. 그러나 정유업계는 내수 가격 압박과 수출 제한 조치로 발생한 기회비용을 합산해 누적 손실이 약 5조 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정부는 서류로 확인 가능한 원가 상승분만 예산 한도 내에서 인정하겠다는 잣대를 고수하며 양측의 셈법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무엇보다 업계의 허탈감을 키운 것은 손실 정산 시점에 맞춰 난데없이 등장한 사정 당국의 '담합 수사' 리스크다. 검찰은 과거 유가 변동 과정에서 정유사들의 부당 이익 여부를 겨냥해 전방위적인 수사에 돌입했다. 산업부는 정산 절차와 수사가 철저히 별개라고 선을 그었지만, 업계는 손실보전금을 깎기 위한 정부의 전형적인 사정 정국 조성용 카드로 의심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의 기초 체력이 규제에 갉아먹히는 사이에 글로벌 경영 환경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세계 최대 소비국 중국은 내수 경기 침체 장기화로 자국 내 수요가 부진하자 남는 석유제품을 아시아 시장에 밀어내기식으로 수출하고 있다. 이로 인해 아시아 역내 재고가 급증하며 핵심 수익 지표인 싱가포르 복합 정제마진은 손익분기점을 맴돌고 있다.
이는 내수 손실을 수출로 만회해 온 국내 정유 4사(SK에너지·GS칼텍스·에쓰오일·HD현대오일뱅크)의 밸류체인 경쟁력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요인이다. 글로벌 경쟁사들이 친환경 항공유(SAF) 등 미래 포트폴리오 전환에 천문학적 자본을 쏟아붓는 것과 심각하게 대조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정부 정책의 '예측 가능성' 복원이다. 위기 땐 밸류체인 붕괴를 막는다며 민간 기업에 헌신을 강요하고 정산 시점엔 사법적 잣대와 꼬투리 잡기로 비용 지급을 회피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인위적인 가격 통제와 예산 한도에 맞춘 깜깜이 정산 대신 글로벌 원유 시장 상황과 연동된 투명한 손실보전 가이드라인을 명문화해야 한다.
중국의 밀어내기 수출과 정제마진 악화로 고군분투하는 국내 정유사들의 발목을 자국 정부의 엇박자 정책 리스크가 잡아선 곤란하다. 정부의 정책은 일관성과 신뢰에 기반해야 한다. 국가적 에너지 안보 위기에서 수조 원의 출혈을 감수한 대가가 수사 압박이라면 향후 제2, 제3의 공급망 위기 때 자발적으로 시장 안정에 나설 기업은 없다. 사법 칼날을 들이대며 압박하기 전 시장 원리에 기반한 출구 전략부터 선제적으로 내놓아야 할 때다.
[미디어펜=김동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