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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엑스 광고판에 갑자기 ‘검은 깃발’…프리즈 서울이 바꾼 삼성동 풍경

입력 2026-09-03 11:27:49 | 수정 2026-09-03 11:28:30
조태민 기자 | chotaemin0220@mediapen.com
[미디어펜=조태민 기자]서울 삼성동 코엑스 앞을 지나던 시민들이 3일부터 조금 낯선 장면을 만나게 된다.

기업 광고와 K팝 콘텐츠가 쉴 새 없이 지나가던 초대형 전광판에 황량한 텍사스 유전이 나타난다. 그 한가운데 세워진 깃대에서는 국기 대신 검은 연기가 끊임없이 뿜어져 나온다.

아일랜드 출신 미디어 아티스트 존 제라드(John Gerrard)의 대표작 ‘Western Flag 2017’이다.

3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CJ CGV와 미디어 솔루션 기업 키노톤은 프리즈 서울 2026 개최에 맞춰 코엑스 K-POP SQUARE MEDIA에서 존 제라드의 작품을 선보인다.

단순히 기존 영상을 대형 전광판에 옮긴 것은 아니다. K-POP SQUARE MEDIA의 비대칭 곡면 스크린 구조에 맞춰 작가 측이 서울 전용 버전 ‘Western Flag (2017) for Seoul’을 별도로 제작했다.

작품 선정과 큐레이션, 상영 기획 및 미디어 구현은 키노톤이 맡았다. 존 제라드와 MDAC 프로덕션이 서울 전용 버전을 제작하고 키노톤이 실제 대형 미디어에서 작품이 구현되도록 기술적 적용을 진행했다.

작품은 한 번에 약 1분씩 상영된다. 광고가 이어지던 전광판에 갑자기 검은 연기의 깃발이 등장하는 셈이다.

AI 생성 이미지


▲ 석유가 솟구쳤던 땅에 ‘검은 깃발’…보이지 않는 탄소를 보여주다

화면에 등장하는 장소는 아무 곳이나 선택한 것이 아니다. 미국 텍사스의 스핀들톱이다.

1901년 이곳에서 이른바 '루커스 가셔'가 터지면서 대규모 원유가 발견됐다. 현대 미국 석유산업의 출발을 상징하는 장소 가운데 하나다.

존 제라드는 현재 황폐해진 스핀들톱의 모습을 디지털 공간에 다시 만들고 그 한가운데 깃대를 세웠다.

그런데 깃대에 매달린 것은 천으로 만든 국기가 아니다. 검은 연기가 계속 뿜어져 나오면서 깃발 형태를 만든다.

기후변화를 일으키지만 눈으로 볼 수 없는 이산화탄소를 검은 연기로 시각화한 것이다. 화석연료가 만들어낸 현대 산업문명의 번영과 그 대가를 하나의 이미지에 담았다.

2017년 처음 공개된 이 작품은 영국 채널4가 ‘지구의 날’을 맞아 의뢰한 작품이다. 당시 런던 서머싯하우스의 대형 LED 화면에서도 공개됐다.

흥미로운 점은 작품이 일반적인 영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카메라로 촬영한 텍사스 영상을 반복해서 틀어주는 방식이 아니다.

작가가 구축한 가상 스핀들톱은 실제 텍사스 현지의 시간과 나란히 움직인다. 실제 장소의 일출과 일몰, 계절에 따른 낮의 길이 등이 디지털 환경에 반영되고 소프트웨어가 필요한 화면을 실시간으로 계산한다.

따라서 정해진 시작과 끝이 있는 동영상이라기보다 계속 살아 움직이는 가상의 풍경에 가깝다.

▲ 원래 ‘광고를 끊고’ 등장했던 작품…이번엔 광고판 속으로

이번 서울 전시가 흥미로운 이유는 작품의 탄생 배경에도 있다.

‘Western Flag’는 처음부터 미술관 벽에 조용히 걸어두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었다.

2017년 영국 채널4는 지구의 날 하루 동안 정상적인 TV 프로그램과 방송 흐름 사이에 이 작품을 짧게 삽입했다.

광고나 프로그램을 보던 시청자의 화면에 갑자기 검은 연기의 깃발이 등장하도록 한 것이다.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TBA21은 ‘Western Flag’가 광고에서 사용하는 강렬하고 단순한 시각언어를 차용했다고 설명한다. 짧은 시간 화면에 등장해도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번 서울 버전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연출된다.

평소 기업 광고와 브랜드 콘텐츠가 이어지는 삼성동 대형 전광판에 약 1분 동안 ‘Western Flag’가 끼어든다.

광고가 도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바로 그 장소를 현대미술의 전시장으로 잠시 바꾸는 셈이다.

코엑스 일대 초대형 미디어 역시 최근 단순한 광고판에서 도시형 콘텐츠 플랫폼으로 변신하고 있다.

CJ CGV는 지난 7월 삼성동 강남아이즈의 초대형 디지털 미디어를 12K 초고해상도와 최대 1만2000니트 밝기로 리뉴얼했다.

대형 곡면 LED와 아나모픽 콘텐츠를 활용해 광고뿐 아니라 미디어아트와 K팝 콘텐츠 등을 보여주는 도시형 문화공간으로 확대하고 있다.

키노톤은 이번 존 제라드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을 대형 디지털 미디어에 소개하는 미디어아트 시리즈도 이어갈 계획이다.

▲ 프리즈·키아프 열린 서울…미술관 밖으로 나온 현대미술

이번 작품 공개 시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세계적인 현대미술 장터인 ‘프리즈 서울’이 2일부터 5일까지 코엑스에서 열린다. 올해로 5회째인 프리즈 서울에는 30개국 125개 이상의 갤러리가 참여한다.

한국국제아트페어 키아프 서울도 같은 장소에서 2일부터 6일까지 열린다.

세계 미술계의 갤러리와 컬렉터, 작가들이 서울에 집중되는 '서울 아트위크' 기간이다.

그동안 프리즈 서울과 키아프를 중심으로 형성된 미술 열기는 전시장 밖으로도 빠르게 확산돼 왔다. 서울 주요 갤러리와 미술관들이 이 기간에 맞춰 전시와 행사를 집중적으로 개최하면서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미술 플랫폼처럼 움직인다.

이번 프로젝트 역시 이런 변화의 연장선에 있다.

관람객이 입장권을 사고 미술관이나 아트페어에 들어가지 않아도 출근하거나 약속 장소로 이동하다 세계적인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Western Flag’는 작품 자체가 대형 공공 스크린과 궁합이 맞는다.

런던 서머싯하우스를 비롯해 미국 캘리포니아 데저트X, 스페인 마드리드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등에서도 대형 LED를 활용한 공공미술 형태로 선보여졌다.
이번에는 그 무대가 서울 삼성동 한복판이다.

프리즈와 키아프를 보기 위해 세계 미술계 관계자들이 모여드는 코엑스 안에서는 수천 점의 작품이 거래되고, 건물 밖에서는 미국 석유산업의 발상지를 배경으로 한 검은 연기의 깃발이 펄럭인다.

상업광고의 공간과 현대미술의 공간 사이에 있던 경계가 서울 도심에서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미디어펜=조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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