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은 2026년 연중기획 ‘AI와 시장경제 2.0, 대한민국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다’를 통해 AI혁명이 가져오는 산업과 시장의 변화, 대한민국 경제의 새로운 성장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조명해 왔다. AI 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글로벌 산업질서의 재편 속에서 우리 기업의 경쟁력은 어떻게 달라지고 있으며, 시장경제는 어떤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맞고 있는지 살펴봤다. 창간 15주년을 맞아 미디어펜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이러한 변화가 실제 산업 현장과 시장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되짚어보는 특별기획 시리즈를 마련했다. 해외 주요국의 정책과 기업 사례, 국제기구의 분석과 통계를 바탕으로 2026년 대한민국 경제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AI 시대의 새로운 성장동력과 시장경제의 발전 방향을 모색한다. 이번 기획은 지난 한 해의 변화와 성과를 점검하는 동시에 대한민국 경제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살펴보는 데 초점을 맞춘다. [편집자주]
[미디어펜=박준모 기자]인공지능(AI) 산업의 급성장이 전력시장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기업이 데이터센터 투자를 확대하면서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설비뿐 아니라 전력을 공급하는 송배전망과 변압기 수요까지 급증하고 있다.
국내 전력기기 기업들은 이러한 변화의 직접적인 수혜를 입고 있다. HD현대일렉트릭과 효성중공업, LS일렉트릭 등은 미국을 중심으로 AI 데이터센터에 공급할 초고압 변압기와 배전 설비 계약을 잇달아 체결하며 수주 기반을 넓히고 있다. 데이터센터의 대규모 전력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설비 투자가 확대되면서 국내 업체들의 사업 기회도 커지는 추세다.
실제로 효성중공업은 지난 9월 한 달 동안 미국 빅테크 기업으로부터 총 3865억 원 규모의 초고압 변압기를 수주했다. LS일렉트릭도 이달 미국 빅테크 기업과 약 1689억 원 규모의 북미 데이터센터 배전 솔루션 공급계약을 체결하며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단순히 전력기기 공급을 넘어 AI 인프라 구축 과정에서 핵심 설비를 담당하는 사업자로 입지를 넓히고 있는 셈이다.
글로벌 빅테크기업이 데이터센터 투자를 확대하면서 전력을 공급하는 송배전망과 변압기 수요까지 급증하고 있다. 이에 국내 전력기기 기업들도 기회가 커지고 있다./사진=AI 생성
AI 경쟁의 무대가 반도체와 데이터센터를 넘어 전력 인프라 확보로 확장되고 있다. 데이터센터를 얼마나 빠르게 구축하느냐뿐 아니라 필요한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기반을 갖췄는지가 국가와 기업의 AI 경쟁력을 좌우하는 요소로 부상하고 있다. 이에 따라 발전설비 확충과 함께 송배전망 보강, 변압기 등 핵심 전력기기의 공급 역량을 확보하려는 움직임도 한층 빨라질 전망이다.
▲데이터센터 전력소비 2030년 2배…전력망 확보 경쟁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전 세계 데이터센터의 전력소비량은 2024년 415테라와트시(TWh)에서 2030년 약 945TWh로 증가할 전망이다. 6년 만에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나는 규모다.
AI 연산에 필요한 고성능 서버가 늘어나면서 데이터센터의 전력소비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서버 자체의 전력 사용량뿐 아니라 냉각과 전력변환, 시설 운영에 필요한 전력도 함께 늘어난다.
특히 미국은 글로벌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의 중심에 있다. IEA는 미국 데이터센터의 전력소비량이 2030년까지 2024년보다 약 130%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문제는 전력 수요가 늘어나는 속도를 송배전망 확충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IEA는 2030년까지 건설 예정인 전 세계 데이터센터 용량의 약 20%가 전력망 연결 지연 위험에 놓여 있다고 분석했다. 데이터센터 건설이 확대되더라도 전력을 공급할 송전망과 변전설비가 제때 확충되지 않으면 실제 가동까지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의미다.
송전망 건설은 인허가와 주민 수용성 확보 등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데다 변압기와 케이블 등 핵심 전력기기의 조달 기간도 길어지는 추세다. 전력 수요가 빠르게 늘어나는 상황에서 공급 인프라를 적기에 확충하기 어려워지면서 관련 설비의 안정적인 확보가 주요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에 따라 글로벌 AI 투자 확대는 데이터센터 건설에 그치지 않고 발전설비와 송배전망, 전력기기 시장 전반의 성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HD현대일렉트릭·효성중공업·LS일렉트릭, 북미 전력시장 공략
국내 기업들도 초고압 변압기와 송배전 설비를 중심으로 북미 시장에서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먼저 HD현대일렉트릭은 올해 3분기까지 미국에서 26억1900만 달러(약 3조5000억 원)의 수주를 달성했다. 지난해 연간 미국 수주가 21억7800만 달러(약 2조9000억 원)였는데, 3분기만에 이를 넘어선 것이다.
효성중공업의 올해 3분기까지 누적 신규 수주액은 10조7318억원에 달한다. 이미 지난해 연간 수주액을 넘어선 규모다. 전체 수주에서 미국 시장이 60% 이상을 차지하며 북미를 중심으로 한 성장세가 두드러졌다.
LS일렉트릭도 3분기까지 누적 수주 4조7626억 원을 달성했다. LS일렉트릭도 미국 시장에서 데이터센터와 전력 인프라 관련 수주를 잇달아 확보했다.
미국의 전력 인프라 시장은 노후 전력망 교체와 신규 데이터센터 건설 수요가 동시에 발생하고 있다. 기존 설비를 교체하는 투자에 AI 데이터센터용 신규 송배전 설비 수요까지 더해지면서 전력기기 업체들의 사업 기회가 확대되고 있다.
국내 기업들도 늘어나는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생산능력 확충에도 나섰다. HD현대일렉트릭은 앨라배마 공장 증설을 진행 중인데, 완료되면 연간 전력변압기 생산능력이 약 50% 늘어나게 된다.
효성중공업도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 초고압변압기 공장 3차 증설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통해 2028년까지 생산능력을 50% 확대한다는 목표다. LS일렉트릭도 미국 유타 공장 증설을 진행 중이며, 2027년 하반기 완공한다는 목표다.
전력기기 산업의 성장세는 AI 시대의 산업 경쟁력이 반도체와 소프트웨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데이터센터가 늘어날수록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변압기와 차단기, 배전설비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AI 인프라 투자 확대가 전통적인 중전기 산업에 새로운 성장 기회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전력기기 업계 관계자는 “미국에서 데이터센터 건설과 노후 전력망 교체 수요가 맞물리면서 전력기기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며 “이에 맞춰 미국에 투자를 진행 중이며, 투자가 완료되면 현지 수요에 더욱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공급 역량도 한층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력망 확충 과제…AI 투자 속도 좌우
우리도 역시 AI 데이터센터 확대에 따른 전력 수요 증가에 대응하고 있다.
정부는 올해 5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기후에너지환경부 간 업무협약을 통해 AI 데이터센터의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위한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AI 데이터센터가 늘어나면서 전력 수요뿐 아니라 전력 사용 패턴도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규모 AI 연산은 순간적으로 전력 사용량이 크게 변할 수 있어 전력망의 안정적인 운영이 중요하다. 정부는 지난 8월부터 AI 데이터센터 연구회를 운영하며 전력망 접속기준과 운영제도 마련에 나섰다.
전력망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설비 투자도 추진하고 있다. 정부는 2028년까지 전압 안정화 설비를 7.6GVar 규모로 확충할 계획이다. 에너지저장장치(ESS)를 활용한 전력망 안정화 기술도 확대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를 현실적으로 산정하는 작업도 중요해지고 있다. 정부는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반영할 AI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를 검토하면서 기업들의 실제 투자계획과 사업 진행 상황을 고려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AI 데이터센터 건설이 발표 단계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투자와 운영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발전설비와 송배전망, 입지 확보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의미다.
AI 시대의 경쟁력은 고성능 반도체와 소프트웨어를 확보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전력망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능력까지 갖춰야 AI 산업의 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다.
국내 기업에는 새로운 기회도 열리고 있다. 글로벌 AI 인프라 투자 확대가 반도체 수출뿐 아니라 초고압 변압기와 송배전 설비, 전력망 운영기술의 해외시장 진출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27년 이후 AI 산업의 성장 경쟁은 반도체 성능뿐 아니라 전력 공급 능력과 인프라 구축 속도에 따라 달라질 전망이다. AI 혁명이 만들어낸 새로운 시장에서 전력산업이 한국 경제의 또 다른 성장동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다만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빠르게 확대되는 가운데 전력 수요 증가에 맞춰 공급 인프라를 적기에 확충하는 것이 과제로 꼽힌다. 김성식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은 최근 열린 ‘전력망 병목 극복’ 세미나에서 “3대 메가 프로젝트의 성패는 전력과 송전망 병목 해소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전력 송전망 비상 실행계획을 수립해 총력 집행하고 전력·계통 관련 제도를 신속하게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디어펜=박준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