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 언론이 증거의 전부…무소불위 국회권력 악용 정치이득 추구
   
▲ 황정민 자유경제원 연구원
역사를 통해 탄핵을 진단한다: 조선DNA에 맞지 않는 근대식 법치주의
 
고등학교 사회탐구 시간에 법치주의에 대해 배운 기억이 있다. 법에 의한 다스림을 의미했다. 우리가 법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국민의 자유와 권리가 지켜지기 때문이다. 절대군주의 말이 곧 질서가 되던 인치(人治)의 시대에는 불완전한 인간에 의해 나의 기본권이 언제든 훼손 될 위험성이 컸다. 그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등장한 정치원리가 바로 법치주의다. 때문에 근대국가에 살고 있는 국민은 누구든 법 이외의 것에 지배되지 않는다. 
 
한 가지 더 중요한 대목은 법치라고 다 같은 법치가 아니라는 점이다. 법치는 두 종류로 나뉜다. 형식적 법치와 실질적 법치가 그것이다. 형식적 법치는 말 그대로 겉모양만 법에 의할 뿐, 법치주의를 고수하는 '궁극적 목적’인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법치의 탈을 쓰고 국민의 기본권을 '정당하게’ 짓밟는다. 형식만 다를 뿐, 인치와 다를 바 없는 무시무시한 제도가 되어버리는 셈이다. 그래서 우리가 지켜야할 법치주의의 핵심은 '실질적 법치’라고 배웠다. 실질적 법치는 법으로서 개인의 기본권을 수호한다. 실질적 법치가 구현되어야 국민의 자유는 법의 태두리 안에서 안전하게 보장된다.
 
'실질적 법치주의'는 어떻게 구현 되는가
 
그런데, 이런 배움의 과정 속에서도 정작 실질적 법치가 지켜지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잘 몰랐다. (배웠는데 잊은 것일 수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는 이슈를 통해서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고 있다. 2016년 12월 9일, 국회는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299명의 의원이 참여한 가운데, 234명의 의원이 탄핵소추에 찬성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이후, 불과 12년 만에 재현된 놀라운 일이다.
 
국회의 탄핵소추는 분명 법치라는 포장지를 두르고 있다. 헌법에 명시된 요건을 모두 충족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65조는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 의결을 보장한다. 재적의원 과반수의 의결과 3분의 2 이상이 찬성한다면, 국회는 대통령을 헌법재판소에 탄핵소추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포장지를 벗겨보면 이야기가 다르다. '졸속’과 '주먹구구’로 가득하다. 이런 게 바로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인치만큼 지양해야 한다고 강조한 '형식적 법치주의’의 전형이 아닐까.

위의 소추안에서 보듯, 국회는 사실관계가 검증되지도 않은 언론기사를 탄핵소추의 증거라며 제출했다. 국회는 특검의 역할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다급하게 자기들이 그려놓은 정치 흐름을 만들어야 했던 건진 알 수 없다. 국회는 사법부의 결과를 받아 보지도 않은 채, 탄핵소추를 여타 법률안 가결보다 손쉽게 처리했다. 그대로 대통령의 직무는 정지됐다. 그렇게 현 정권의 정책을 지지했던 국민들의 의사와 권리는 법치의 탈을 쓴 국가권력에 의해 훼손되고 말았다.

물론 탄핵소추 당시엔, 탄핵소추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했던 국민은 몇 없었을 수도 있다. 언론의 맹렬한 선전선동에 의해 대다수 국민이 감정적으로 큰 실망감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수의 권리와 의사라도 결코 '다수’의 힘과 떼쓰기에 의해 침해받지 않아야 하는 것이 법 존재의 이유다.

   
▲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작년 12월 9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 가결됐다.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킨 건 헌정사상 두번째다./사진=미디어펜


'이성'의 토대라야 실질적 법치는 굳건하다
 
세계사적으로도 '법치’의 가치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지난한 과정 끝에 쟁취한 값진 열매다. 대부분의 서양 국가에서는 전제군주의 무한한 권력에 대항해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수백 년에 걸친 몸부림이 이어졌다. 그 과정은 피로 얼룩지기도 했고, 또 다시 절대왕권이라는 과거로 퇴보하는 비극도 있었다. 처절한 역사적 경험에 의해 계몽된 개인들의 노력이 모여 자유가 서서히 확대되었다. 자유 쟁취를 위한 기나긴 발자취를 걸어온 서구에서는 그만큼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적 성숙도 함께 이루어졌다. 
 
그렇게 발전해온 서구의 법치주의는 이성적이고 과학적이다. 법 적용에 있어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주먹구구는 찾기 어렵다. 명백한 증거를 토대로 한 과학적 논증에 의해서 법은 집행된다. 그래야 법을 제정하고, 집행하는 국가권력이 법치라는 명분아래 국민의 기본권을 함부로 유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이라야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겠다는 법치주의의 궁극적 목적에도 닿을 수 있다. '실질적 법치’는 이성과 논리의 토대 위에서만 구현되는 것이다.
 
1972년 6월 23일, 미국 사회를 뒤흔든 녹취록이 공개된다. 닉슨 행정부가 민주당의 베트남전 반대를 저지하기 위해 불법도청까지 감행한 사건, 일명 '워터게이트’의 전말이 대중에게 알려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본산이라는 자부심이 강한 미국 국민에게 워터게이트 사건이 던진 충격은 굉장했다. 국민은 감정적으로 흥분했다. 당장이라도 대통령을 끌어내릴 듯한 여론이 형성됐다.

그럼에도 미국은 법치주의라는 근대국가의 기초를 져버리지 않았다. 국회는 절제할 줄 알았다. 대통령의 위헌행위를 이성적으로 논증했다. 마침내 국회가 대통령 탄핵소추를 결정하는데 2년여의 시간이 소요됐다. 단 하루 만에 소추안 작성을 완료한 오늘날 대한민국의 법치는 1972년 미국의 수준에도 한참 못 미친다. 
 
'감정'이 앞서는 대한민국 의식 수준
 
우리는 서구와 정반대의 순서로 근대화를 이룩했다. '선(先)제도도입, 후(後)계몽’이다. 이승만이라는 위인의 결단과 국제정세가 잘 맞아떨어져 운 좋게도 근대 서구식 제도가 한반도에 이식됐다. 법치주의의 원리도 이때 함께 입양해왔다. 낡아빠진 조선이 한순간에 근대적 대한민국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선진국의 문턱까지 달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제도의 수준은 결국 국민의 수준에 맞춰지게 마련이다. 제도를 운영하는 주체가 곧 국민이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우리 의식의 계몽수준은 근대식 제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성보단 감정이 앞서고, 정당한 절차아래 선출된 국가수반을 감정적으로 끌어내리기까지 한다. 충동을 가장 절제해야 할 국회는 국민감정에 편승할 뿐만 아니라 정치 이득을 위해 오히려 국민의 분노를 부추기는 진원지가 되고 있다. 

   
▲ 지난 4일 서울 중구 대한문과 시청광장을 중심으로 '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 주최 제16차 태극기 집회가 열렸다./사진=탄기국 유튜브방송 TMT 캡처
 
조선에 머물러있는 한국인의 의식
 
우리 의식 깊은 곳에는 아직도 조선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는 듯하다. 언제쯤 대한민국은 중세 조선DNA의 망령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조선왕조의 지배층은 국가번영과는 거리가 먼 당파싸움에 매몰 돼 망국의 길을 걸었다. 17세기 '환국정치’는 조선 몰락의 필연성에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남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은 각종 이유를 들며 상대 정파에 정치보복을 감행했다.

왕의 허락 없이 유막(油幕)을 사용했다느니, 후궁의 자식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느니, 정비의 득남을 기다려야 한다느니, 온갖 소모적 싸움으로 얼룩졌다. 이 시기 불과 14년 만에 3차례의 환국이 이루어졌다. 그 상황에서 국가번영을 위한 혁신은 남의 나라 이야기에 불과했다. 혁신에 성공해 근대국가로 변모한 이웃에게 지배당한 아픈 역사는 어쩌면 우리 스스로 자초한 결과였던 것이다.
 
그 역사가 2017년에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당은 분열하고, 국회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악용해 정치 보복을 감행한다. 법치주의 존재 이유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근대국가에 살고 있음에도 여전히 우리 두뇌에 남아있는 조선DNA를 하루 빨리 '혁명적’으로 버려야만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다. /황정민 자유경제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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