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동하 기자] 정부의 원유 도입선 다변화 기조와 국내 정유업계의 설비 최적화 한계가 충돌하며 에너지 안보를 둘러싼 구조적 딜레마가 깊어질 것으로 관측된다.
20일 업계에 따르면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최근 호르무즈 해협 재봉쇄 등 지정학적 리스크에 대응해 미국산 원유 도입을 상시 확대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는 중동 의존도를 낮춰 공급망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판단으로 풀이된다.
다만 이런 정책적 방향이 현장 정유사들의 공정 시스템 및 수익성 구조와 배치된다는 지적이 나오며 밸류체인 전반의 긴장감이 고조되는 분위기다.
정부의 원유 도입선 다변화 기조와 국내 정유업계의 설비 최적화 한계가 충돌하며 에너지 안보를 둘러싼 구조적 딜레마가 깊어질 것으로 관측된다./사진=제미나이
◆ 중질류 특화 고도화 설비…유종 변화시 공정 효율 어려워
국내 정유사들의 핵심 경쟁력은 고도화설비(크래킹 센터)에 기반한다. SK이노베이션과 GS칼텍스 등 주요 기업들은 지난 수십 년간 수조 원을 투입해 값이 싼 중동의 중질유를 분해하여 휘발유, 경유 등 고부가가치 제품을 뽑아내는 데 최적화된 밸류체인을 구축했다. 이는 원가 경쟁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산업 구조적 선택이었다.
문제는 정부가 도입을 장려하는 미국산 경질유가 기존 설비와 상충한다는 점이다. 중질유에 맞춰진 공정에 경질유 투입 비중을 높이게 되면 전체적인 증류 밸런스가 무너지며 정제 수율이 하락한다. 이는 같은 양의 원유를 투입해도 실제 수익이 되는 제품 산출량은 줄어드는 결과로 이어질 것으로 분석된다.
더욱이 유종의 급격한 변화는 설비 내부 부식을 가속화하거나 정밀 공정의 촉매제 수명을 단축시키는 등 기술적 결함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업계에서는 현재 설비 구조를 유지한 채 미국산 원유 비중만 높이는 것은 엔진에 맞지 않는 연료를 주입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는 우려를 보이고 있다. 결국 공급망 안정이라는 공익적 가치가 기업의 공정 효율성을 저해하는 상황이 연출되는 셈이다.
◆ 조 단위 개조 비용 부담…정유업계 수익성 방어 비상
정유업계는 정부의 수입선 다변화 압박을 재무적 리스크로 받아들이는 기류가 보인다. 유종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해 설비를 개조하는 데에는 단일 공장당 조 단위의 비용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기 침체와 수요 둔화로 정제마진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대규모 투자는 기업의 현금 흐름에 상당한 압박이 될 것으로 관측된다.
기업별 이해관계도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미 특정 중동 국가와 장기 공급 계약을 맺고 밸류체인을 고착화한 기업의 경우 수입선 전호나에 따른 위약금 부담이나 원료 조달 비용 상승 등 이중고를 겪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미국산 경질유의 경우 중동 원유보다 수송비용이 높고 도입 단가도 유동적이라 설비 개조 비용까지 합쳐질 경우 최종 제품 가격 경쟁력이 크게 훼손될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유사들은 정부의 정책적 결단에 속도를 맞추기보다는 관망세를 유지하며 실질적인 유인책을 기다리는 모양새다. 단순히 '안보'라는 명분만으로 민간 기업에 천문학적인 투자 부담을 전가하기에는 시장의 불확실성이 너무 크다는 판단이다. 따라서 향후 정유업계의 행보는 정부가 제시할 세제 혜택이나 금융 지원 등 인센티브의 실효성에 따라 갈릴 것으로 전망된다.
◆ 안보 비용 분담 쟁점…민관 합동 금융 지원 대두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려는 정부와 수익성을 사수해야 하는 정유사 간의 입장 정리는 결국 비용 분담의 문제로 귀결될 것으로 보인다. 업계에서는 정부가 다변화 원유 도입 시 관세 혜택을 주는 기존 방식에 더해 설비 개조 자금을 장기 저리로 지원하거나 특별 감가상각을 적용하는 등 정책 수단이 동원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시장 구조 변화도 예상된다. 정부가 미국 및 아프리카 등으로 공급망을 넓히는 과정에서 국영 에너지 기업과 민간 정유사 간의 공동 구매나 원유 스와프(교환) 등의 새로운 협력 모델이 등장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이는 개별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지정학적 리스크를 국가 차원에서 분산하는 구조적 대안이 될 것으로 분석된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의 다변화 정책이 성공하려면 정유사들이 유종의 성질에 관계없이 최고의 효율을 낼 수 있는 공정 유연성을 갖춰야 한다"며 "에너지 안보를 국가적 자산으로 인식하고 조 단위의 설비 전환 비용을 민관이 함께 분담하는 구조적 결단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디어펜=김동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