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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가는 뛰는데 판가는 요지부동…K-석화, 샌드위치 딜레마

입력 2026-05-03 09:12:15 | 수정 2026-05-03 09:11:59
김동하 기자 | rlacogk@mediapen.com
[미디어펜=김동하 기자]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로 글로벌 해상 물류가 마비되면서 국내 석유화학 업계가 체질 개선을 위해 추진해 온 스페셜티 전환 성격이 바뀌고 있다. 과거 수익성을 높이기 위한 중장기적 방향에 더해 폭등한 원가를 고객사에 전가할 수 있는 수단으로 격상됐다. 원가 폭등과 소비 침체라는 샌드위치 위기 속에서 K-석화는 발주처에 대한 가격 결정권을 되찾기 위해 스페셜티 중심 포트폴리오 대수술에 사활을 걸고 있다.

석유화학업체들이 밀집해 있는 여수산업단지 전경./사진=미디어펜 김상문 기자



3일 국제금융센터(KCIF)에 따르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이 하루 5척 수준으로 급감하며 사실상 물류망이 마비되자 국내 석화 업계의 원가 방어선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소시에테제네랄(SG)은 한국의 4월 수입액 증가율이 전월(13.2%)을 상회하는 14.4%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며, 이는 물량 감소에도 불구하고 대체 공급처 확보 경쟁으로 인해 수입 단가가 폭등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나프타 등 기초 원료의 중동 의존도가 압도적인 국내 기업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공장 가동을 멈출 수 없는 석화 업계는 남미나 미국 등 운항 거리가 훨씬 긴 지역에서 비싼 프리미엄과 물류비를 지불하며 원료를 '패닉 바잉'해야 하는 처지다. 과거 100달러 안팎의 유가 변동은 범용 제품(플라스틱 등)의 판매 가격을 올려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었으나, 지금의 원가 폭등은 기존의 밸류체인 구조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임계점을 넘어섰다는 평가다.

이는 글로벌 기초 원료 시장이 극단적인 공급자 우위로 재편되었음을 시사한다. 대체 조달 과정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추가 비용을 기업 스스로 흡수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면서, 석화 업계의 1분기 영업이익률은 곤두박질칠 위기에 처했다.

◆ 지갑 닫은 발주처…가격 인상 거부에 막히니 퇴로

문제는 밸류체인 하단(다운스트림)의 고객사들이 제품 가격 인상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글로벌 소비재 기업들은 이번 유가 쇼크와 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인해 심각한 '가격 압박 테스트'에 직면했다. 팬데믹 이후 누적된 인플레이션으로 최종 소비자의 지갑이 굳게 닫히면서, 기업들이 판매가를 올리는 순간 수요가 절벽처럼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포장재, 섬유, 가전 등의 외장을 만드는 범용 플라스틱 소재의 판가 인상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석화 업체가 원가 상승분을 반영해 달라고 요구해도 수요 침체에 빠진 발주처들은 "가격을 올리면 거래처를 중국 등 다른 국가로 바꾸겠다"며 압박하는 역학 관계가 고착화됐다.

결국 비싸게 원료를 사서 싸게 제품을 넘겨야 하는 가혹한 '마진 스퀴즈(수익성 악화)' 속에서, 국내 석화 기업들은 외부 변수의 충격을 고스란히 떠안는 완충재로 전락했다. 과거 호황기 때 범용 제품을 대량으로 찍어내어 박리다매로 수익을 올리던 사업 모델의 수명이 완전히 끝났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구조적 한계 속에서 LG화학, 롯데케미칼 등 주요 석화 기업들이 밀어붙이는 '스페셜티 전환'은 과거와 그 결이 완전히 다르다. 이전의 스페셜티 전환이 미래 성장 동력 확보 차원의 여유로운 포트폴리오 다변화였다면 지금은 '고객사에게 가격을 올려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를 확보하기 위한 필사적인 생존 전략이다.

배터리 핵심 소재, 태양광 패널용 필름, 고기능성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등 고도의 기술력이 집약된 스페셜티 제품은 고객사가 쉽게 공급처를 바꿀 수 없다. 진입 장벽이 높아 범용 제품처럼 중국의 저가 공세에 흔들리지 않으며, 거시 경제가 악화되어도 발주처가 반드시 사야만 하는 '대체 불가성'을 지닌다. 이는 곧 원가가 올랐을 때 판가에 그 비용을 온전히 전가할 수 있는 강력한 '가격 결정권'이 석화 기업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석유화학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범용 제품으로 돈을 벌면서 스페셜티 연구개발에 투자하는 여유가 있었지만 지금 범용 밸류체인은 사실상 이익을 낼 수 없는 구조로 망가졌다"며 "발주처의 판가 인하 압박을 튕겨내고 원가를 100% 전가할 수 있는 독보적 기술력의 스페셜티 소재만이 현시점 K-석화 업계가 살아남을 유일한 동아줄"이라고 말했다.

[미디어펜=김동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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