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배소현 기자] 최근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지면서 유럽에서 냉방을 바라보는 시각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계절가전 정도로 여겨졌던 에어컨이 폭염 대응을 위한 생활 인프라로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글로벌 냉난방공조(HVAC) 시장도 새로운 성장 국면에 진입하는 모습이다. 업계에서는 냉방 시장의 경쟁 축 역시 에너지 효율과 인공지능(AI), 통합 제어 기술을 갖춘 솔루션 경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3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유럽 전역에서는 40도 안팎의 폭염이 이어지면서 냉방기기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다. 그동안 유럽은 비교적 온화한 기후와 자연 환기를 선호하는 생활 방식, 환경 규제, 역사적 건축물 보존 정책 등으로 에어컨 보급이 더뎠던 시장으로 꼽혀왔다. 국제에너지기구(IEA) 등에 따르면 유럽의 가정용 에어컨 보급률은 약 20% 수준으로, 미국의 약 90%와 비교하면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그러나 폭염이 의료 체계와 학교, 공장, 상점 운영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분위기는 달라지고 있다. 프랑스와 영국 등에서는 병원과 요양시설, 학교 등 취약 시설을 중심으로 냉방 확대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으며, 정치권에서도 에어컨 보급을 둘러싼 논쟁이 이어지는 상황이다. 냉방을 에너지 소비와 탄소배출 문제로만 바라보기 어려울 만큼 폭염이 일상과 안전을 위협하는 변수로 부상한 셈이다.
이 같은 변화는 단기적인 여름철 판매 증가를 넘어 유럽 HVAC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키우는 요인으로도 꼽힌다. 특히 유럽은 오래된 건축물과 임대 주택 비중이 높아 외벽 타공이나 실외기 설치가 쉽지 않고, 에너지 효율과 소음, 냉매 규제 역시 까다로운 편이다. 이에 따라 단순히 에어컨 한 대를 판매하는 방식보다 주거 환경과 건물 구조, 전력 사용량까지 함께 고려한 냉방 솔루션 수요가 확대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시장에서는 폭염의 일상화가 유럽의 냉방 문화를 바꾸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에어컨이 더 이상 일부 지역이나 특정 계층의 선택재가 아니라 주거 인프라의 일부로 편입될 경우, 냉난방을 함께 담당하는 히트펌프와 AI 기반 에너지 관리, 건물 단위 공조 시스템의 중요성도 커질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 유럽 맞춤형 전략 강화… 기술 경쟁력 앞세운 삼성·LG
삼성전자와 LG전자도 이 같은 흐름에 맞춰 유럽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두 회사는 중국 업체들의 저가 공세와 달리 고효율, 친환경, AI 제어, 현지 맞춤형 설치 환경 대응 역량을 앞세워 프리미엄 시장에서 차별화를 꾀하는 모습이다.
삼성전자는 유럽 HVAC 사업 기반을 강화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특히 스웨덴 공조 전문기업 플랙트그룹 인수 추진을 통해 상업용 공조와 데이터센터, 클린룸 등 B2B 영역까지 포괄하는 현지 사업 역량을 넓히고 있다. 플랙트그룹은 에너지 효율을 기반으로 실내 공기질과 냉난방 환경을 관리하는 공조 솔루션 기업으로, 유럽 내 고객 기반과 설계 역량을 갖춘 곳으로 평가된다.
삼성전자는 가정용 시장에서도 고효율 히트펌프와 주거용 냉방 솔루션을 앞세우고 있다. 유럽은 겨울 난방 수요가 큰 지역인 만큼 여름 냉방과 겨울 난방을 함께 해결할 수 있는 히트펌프 기술이 중요하다. 삼성전자는 EHS(Eco Heating System)와 윈드프리(WindFree) 등 제품군을 통해 에너지 효율과 사용 편의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AI 기반 운전 모드와 스마트싱스(SmartThings)를 통한 제어 경험도 강화하고 있다.
차세대 냉각 기술도 주목되는 대목이다. 삼성전자는 기존 냉매 압축기 방식의 한계를 줄일 수 있는 펠티어 냉각 기술 등 미래형 냉방 기술 개발에도 나서고 있다. 유럽 시장은 냉매와 전력 사용, 건물 외관 규제가 모두 까다로운 만큼 냉매 사용을 줄이고 설치 제약을 낮추는 기술이 중장기 경쟁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LG전자는 현지 주거 환경에 맞춘 제품과 HVAC 포트폴리오를 함께 강화하고 있다. 우선 실외기 설치나 벽 타공이 어려운 유럽 주택 구조를 고려해 이동식 에어컨과 창문 배기형 제품 수요에 대응하고 있다. 이들 제품은 건물 외관 훼손 부담이 적고 설치가 비교적 간편해 역사적 건축물이 많은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에서 활용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동시에 LG전자는 고효율 히트펌프 '써마브이(Therma V)'를 중심으로 유럽 HVAC 시장 공략을 확대하고 있다. 써마브이는 냉난방과 온수 공급을 아우르는 제품군으로, 유럽의 탄소중립 정책과 난방 전환 수요에 맞닿아 있다. 여기에 AI 기반 스마트 제어 시스템과 상업용 공조 솔루션을 결합하면 가정용 제품 판매를 넘어 건물 단위 에너지 관리 사업으로 확장할 수 있다.
생산 대응 측면에서도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LG전자는 급증하는 냉방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경남 창원 에어컨 생산라인을 예년보다 이른 시점부터 가동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유럽향 이동식 에어컨과 가정용 에어컨 수요가 늘면서 남유럽과 서유럽을 중심으로 매출이 두 자릿수 성장세를 보인 점도 긍정적이다.
물론 중국 업체들의 가격 경쟁력은 변수다. 최근 유럽에서는 메이디, 하이얼, 그리, TCL 등 중국 업체들이 이동식 에어컨과 보급형 제품을 앞세워 빠르게 수요를 흡수하고 있다. 일부 제품은 품절 사태가 나타날 정도로 판매가 급증했고, 프랑스와 북유럽 일부 지역에서는 중국 업체 판매량이 전년 대비 300% 이상 늘어난 사례도 전해졌다.
다만 업계에서는 유럽 냉방 시장이 장기적으로 가격 경쟁만으로 움직이기는 어렵다고 보고 있다. 전력요금과 에너지 효율, 소음 기준, 냉매 규제, 설치 환경까지 고려해야 하는 시장인 만큼 제품 단가보다 운용 비용과 안정성, 친환경 기술이 더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냉방 수요가 일시적 폭염 대응을 넘어 건물 에너지 관리와 주거 환경 개선으로 확장될 경우 삼성전자와 LG전자의 프리미엄 HVAC 역량이 더 부각될 수 있다.
업계 내 한 관계자는 "유럽 냉방 시장은 단순히 값싼 에어컨을 많이 공급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시장"이라며 "폭염이 반복될수록 에너지 효율, 친환경성, 설치 편의성, AI 기반 운영 역량을 함께 갖춘 솔루션의 가치가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의 삼성전자와 LG전자는 가전과 HVAC, 스마트홈, 에너지 관리 기술을 함께 보유하고 있는 만큼 유럽 냉방 문화 변화 속에서 중장기 성장 기회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디어펜=배소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