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용구 소설가·정신과전문의
이념의 전선이 판치던 시절,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입적해 키우며 진정한 용서의 길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준 목회자 손양원. 분열과 갈등, 증오로 치닫는 이 시대에 그가 던지는 울림은 감동을 넘어 가슴 묵직한 과제를 던진다. 미디어펜은 소설가이자 정신과 전문의인 신용구 원장의 '소설 손양원:용서'를 연재한다. 소설을 통해 진정한 용서와 화해 그리고 우리사회의 병폐인 갈등과 증오를 치유하는 길을 묻는다. 필자인 신 원장은 용서의 의미를 새삼 일깨워준 손양원 목사님께 감사를 드리고, 독자들 역시 손양원 목사의 인생을 통해 용서의 진정한 의미를 가슴에 한번 되새겨 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편집자 주]

   

애양원 교회-1 
 
남도의 파란 가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푸른  남해와 하늘의 푸른 빛깔이 한 몸에 되어 수평선으로 이어져 어디가 바다인지 어디가 하늘인지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다.

애양원 언덕에 서면 남쪽으로는 소록도가 동쪽으로는 광양만이 눈에 들어오고 저 멀리 희미하게 경상도 하동 땅도 보인다. 

또 화려한 봄꽃과는 달리 소박한 맛이 일품인 코스모스며 해바라기며 접시꽃이며 들국화가 이 언덕에도 흐드러지게 피어서 온 세상이 가을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서너 명의 아이들이 떼를 지어 언덕길을 내달리며 고함을 치자, 풀밭 사이에 숨어 사랑을 나누던 까투리 한 쌍이 놀라서 푸드덕 날개 짓을 하면서 창공을 차고 오른다. 뜨거운 태양아래 우유빛깔의 뽀얀 속살을 채워가던 들판의 벼도 이젠 제법 누르스름한 황금빛을 띠어간다. 쌀이 다 익어갈 즈음엔 마을에 한바탕 큰 잔치도 벌어질 것이다. 

들판의 곡식도 영글어가겠다 해방이 되어 일본도 이 땅에서 물러났겠다, 이젠 마을 사람들은 일본사람들에게 곡식을 빼앗기지 않을까 티끌만치도 마음 졸이며 애를 태울 필요가 없었다. 거적때기 하나 얹어 마당에 그냥 쌓아두어도 누구 한 사람 훔쳐갈 사람이 없다.

불안과 두려움의 불씨도 사라지고 불신과 의심의 장벽도 허물어졌다. 정말 세상에 평화가 온 것이다.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는 태평성대의 세상이 온 것이다. 

이 아름다운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는 애양원 교회 식구들 역시 몹시 들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예배당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박장대소 하며 흥겹게 떠들었는데, 여남은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얼굴이 제각각이 아니라 어찌된 영문인지 눈대중으로는 구분이 어려울 만큼 대개가 엇비슷하게 보였다. 그런데 그 생긴 생김이 다들 상당히 남달라서 겁 많은 사람들이라면  그들을 면전에서 두고 보기가 적잖이 곤혹스러울 수 있다. 

코는 말의 안장을 닮아 폭삭 내려 앉아 있고, 눈썹은 누가 떼어갔는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고, 손은 손가락이 조막손 마냥 뭉그러져 있거나 아니면 고리로 사용해도 될 것 같은 갈고리 손이다.

또 어떤 이는 한 쪽 다리를 절단해 지팡이를 짚었고 또 어떤 이는 입술은 물론이고 눈꺼풀도 처져 있다. 처진 눈꺼풀은 도통 감을 수가 없어 눈이 항시 공기 중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눈은 항상 바짝 말라 있고 상처가 자주 나 염증에 시달렸다. 이 탓에 눈자위에 시뻘건 핏줄이 성성하게 돋아나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들은 세간에서 흔히 일컫는 한센병 환자들이다. 말하자면 고래로 천형(天刑)이라 알려진 나병을 앓게 되어 가족과 함께 살지 못하고 불가피하게 집을 나와 남해가 내려다보이는 이 언덕에 모여 살고 있는 것이다. 생김이 비슷하다 해서, 이곳에 온 사정과 사연이 같은 것은 아니다. 다 각양각색이다.

야반도주하듯 집을 홀로 떠나 온 사람도 있고, 사랑하는 여인의 새 출발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이곳으로 스스로 몸을 감춘 진정한 사랑을 아는 남정네도 있고, 아이를 낳은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소박맞듯 시댁에서 매정하게 쫓겨난 박복한 여인도 있고, 병에 걸려 자살을 시도하다 성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며 유리걸식하다 이곳에 정착한 사연이 기구한 사람도 있고, 고등고시에 합격했는데 병 때문에 낙방을 하여 낙심 끝에 이곳을 찾은 사람도 있다.

아무튼 백이면 백 이곳에 머물게 된 사연은 다 달랐다. 그러나 현재 처한 입장은 거의가 다 비슷했다. 모두가 가족들에게 점차로 잊혀 져 가는 존재가 되고 있다는 사실들이었다.

이곳에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에는 이들에 대한 걱정과 이들에 대한 미안함, 고마움, 연민, 죄책감 때문에 수시로 돈이며 먹을 것이며 편지를 꼬박꼬박 잊지 않고 보내오고 부쳐오고 찾아오던 사람들의 손길과 발길이 시간이 흐르면서 차차로 잦아들었던 것이다.

여명이 밝아오면서 자취를 하나 둘 자취를 감추는 새벽별처럼, 흐르는 세월과 함께 이들도 가족들의 뇌리에서 하나 둘 사라져가고 있었다.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과 서운함 그리고 가슴에 맺힌 서러움 때문에 때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사진틀 속의 얼굴들이 빛이 바래 가듯 그들 역시 그들을 잊어 가는지 이젠 그 같은 감상적인 생각에서 많이 벗어났다.

대신 이곳에  함께 모여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과는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며 너나 할 것 없이 하나가 되어 더 끈끈한 정을 나누며 살갑게 살고 있었다.

이 애양원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사실은 한 가족이요, 모두가 정다운 이웃사촌이었다.  나아가서 하느님을 모시는 하느님 하씨 성을 가진 일족들이기도 했다. 

"정말인겨, 권 집사, 사람들이 고리 마이 모였어야, 우리 목사님이 참말로 고렇게 인가가 좋당가, 잉!"
"말해서, 뭐해요, 정말이지 구름떼 같이 모여들었다니까?"
"참말인가? 참말로?"
"아이, 그렇다니까요? 박 권사님, 제가 뭐 하러 그런 거짓말하겠어요?"
"오메, 이를 우짠디야, 심쟁이 터저불 것 같구먼!"
  
이틀 전에 있었던 서울 남산 교회 부흥회에 손양원과 함께 참석했다가 돌아온 안수 집사 권이목의 얘기에 제직회(주: 안수 집사 이상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 교회 살림을 꾸려가는 성도들의 모임)에 참석한 교회 간부들이 귀를 쫑긋 세우며 듣고 있다가, 손 목사를 보기 위해 부흥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남산 일대 교통까지 마비가 되었다는 소식에는 모두 제 일인 양 뛸 듯이 기뻐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정말 우리 목사님은 하늘이 내신 분이라니까요!"
"당연허제, 당연헌기라, 암, 그렇고말고!"

넘치는 기쁨에 손에 손을 잡고 눈물을 훔치고 있을 때에, 서울 소식을 전해서 사람들을 들뜨게 했던 권 집사가 갑자기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었다.

"그런데, 걱정꺼리가 하나 생겼어요."

   
▲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에 위치한 애양원. /사진=애양원 홈페이지

좋은 일에는 항시 마(魔)가 끼인다는 속설을 믿는 사람들은 그의 말에 순간 얼굴이 굳었다. 한참 기분이 고조되어 있는 잔칫상에 찬물을 끼얹는 소리였다. 사람들의 표정이 다 조심스러웠다. 또 어떤 이는 그를 보고 괜히 병 주고 약 준다는 생각을 하며 입이 가벼운 그를 책망하여 언짢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와, 무슨 일인디? 어서 말혀 봐? 말해보더라고?"
"설마, 목사님 일은 아니겠지, 잉?"
"목사님 일이 맞아요."

그 말에 모두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지고 하나 같이 표정들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들은 궁금했지만 감히 권 집사에게 물어 볼 용기가 나지 않아 모두가 서로의 얼굴만 살피며 눈치를 보았다. 여기저기서 꼴깍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럴 때는 어른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칠순이 다 되어가는 최고령자이자 성질이 급한 김 장로가 손등으로 뭉그러진 코끝을 비벼대며 말을 아끼고 있는 권 집사를 다그쳤다.

"와 무슨 일인디, 말을 못하고 있는겨? 싸게 말혀봐, 싸게!" 

김장로의 채근을 받고서야 권 집사가 입을 열었다.  

"어르신들 우리 목사님 말예요, 혹시 다른 교회로 보내드리면 안 될까요?"
"고게 무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여? 고걸 시방 말이라고 하능가?" 

그에 말에 흥분한 김장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다. 아닌 밤에 홍두깨라고 그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권 집사의 말이 실로 어이가 없었다. 손목사가 자신들의 곁을 떠난다는 것을 그들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손목사가 신사참배문제로 옥살이를 할 때도 손목사의 빈자리를 견디어 가며 그가 나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린 사람들이었고, 손 목사 역시 출옥하면서 집보다 먼저 찾은 곳이 이 애양원 교회였다. 그러므로 손양원과 애양원 교회 식구들은 둘이 아닌 하나였고, 부부와 같은 일심동체였다.

오년이나 헤어져 있다가 겨우 새 살림을 차리게 된 마당에, 그가 떠난다? 이것은 도무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파르르 화를 내며 목청을 높였다. 

"암, 고기 무신 말이당가? 말도 안 되제"
"우리 목사님을 와 딴 데로 보내?"
"근디 시방 그기 무신 말 뜻이당가?"

모두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언성을 높이고는 있지만, 정작 불을 지핀 권 집사가 아 무 말이 없자, 그들은 다시금 안색이 어두워졌다. 권 집사의 침묵이 오히려 문제의 심각성을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아 더 불안했던 것이다. 권 집사도 사람들의 마음을 읽었는지 입을 닫고 있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 생각해 그제야 이야기의 전말을 소상하게 전했다. 

"지금 사방에서 목사님을 모셔가려고 난리가 났어요, 목사님을 모시려고 하는 교회가 열 곳이 넘어요."

그의 전언에 사람들이 모두 당황했다.

"그 중에서 부산 초량 교회가 가장 적극적이에요, 그쪽에서는 모든 장로들이 다 올라왔어요, 목사님을 꼭 자기 교회로 모시고 싶다고......." 

미군은 일본군에 대한 최후의 공격에 앞서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해 일본군의 사기를 먼저 꺾은 다음, 본토 공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일본군의 후방 기지를 완전히 무력화시킨다는 전략에 따라, 일본군의 후방 기지가 즐비한 부산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몇날 며칠 동안 밤낮없이 감행했는데,  이 공습으로 부산 시내의 다른 어느 건물보다 초량 교회의 피해가 컸다.

교회 건물이 반파되고 담임 목사가 건물더미네 깔려서 죽고 사람들까지 많이 다쳐, 이 교회는 해방이 된지 한 달 보름이 다 되어가도록 아직도 그 폭격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기도 했다. 목회자를 잃은 교회 식구들은 목자를 잃은 양떼들처럼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해서, 교회 장로들은 혼란에 빠진 교회 재건을 위해 이 교회 성도들을 위한 특별한 마음의 위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와중에 그들이 선택한 사람이 손양원이었다. 왜정 때는 장로회 총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거부당하면서까지 신사참배 거부를 포기하지 않았고, 세상에서 버림받아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사는 한센병 환자들의 친구로 평생을 살아왔으며, 일본인 간수에게까지 옥중의 성자로까지 불린 목회자 손양원, 그 같은 사람이라면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상처받은 영혼들을 완전하게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 초량 교회의 장로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한달음에 달려와 손 양원에게 도움을 구하고 나선 것이었다. 물론 담임 목사만 맡아준다면 충분한 사례비와 더불어 그의 가족의 생계 문제는 물론이고 큰 아들의 미국 유학비용까지 교회에서 확실히 책임진다는 조건도 붙어 있었다.

이 같은 파격적인 조건에도 손목사가 눈도 깜빡하지 않고  자신에게는 오로지 애양원 교회뿐이라는 말을 했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가, 형편이 여의치 않으면 2년 정도만이라도 초량 교회를 꼭 밑아 달라고 장로들이 통사정을 하는 바람에 손목사가 고민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모두의 마음이 가슴에 돌을 하나 매달아 놓은 듯이 다시금 무거워졌다.

지금 자신들이 손 목사의 목회 봉사에 대해 사례하고 있는 것은 고작 한 달에 쌀 한 말 정도이니, 초량 교회와 같이 큰 교회에서 그를 위해 책정해 놓은 사례비에 감히 비할 비가 못 되었다. 

게다가 그가 옥살이를 하는 동안 그의 가솔들이 총독부의 감시와 핍박을 피해 부산 범냇골에서 둥지를 틀었고, 큰 아들과 둘째가 통을 만드는 공장에 다니며 가족들을 보살폈기 때문에 손 목사와 부산의 인연은 없지 않았다. 범냇골에서 해안가를 돌아 언덕 하나만 넘으면 바로 초량이었다.

그 동안 손목사와 손목사의 가족들이 고생을 한 것이나 손 목사의 장래를 생각하면 백 번 천 번 그를 초량 교회에 보내는 것이 그들로서는 옳은 일이라 여겼다.

손 목사는 그런 모든 사정과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에 아랑곳하지 않고 옥에서 나오자마자 자신이 묻힐 곳은 애양원 교회라며 가족들보다 자신들을 먼저 찾아 준 사람이었다. 이런 희생적인 사람을 자신들의 욕심 때문에 아무도 찾지 않는 한적한 바닷가 시골구석에 고삐를 끼우듯이 그의 사랑에 빌붙어 그를 붙들어 맨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할 짓은 아니라 생각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복잡했다. 

"휴"

나오는 것은 한숨 뿐이었다. 이어지는 한숨 소리에 어른인 김 장로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차며 나섰다.

"시방 언제까지 땅 꺼지는 소리만 하고 자빠져 있을 겨? 암만 해도 목사님 스스로는 안 가실게 분명헝께, 우리가 사람을 보내자고, 말하자면 특사를 말이제, 목사님도 한번은 부귀영화를 누려봐야 안되것는가?"
"하무요, 그 말씀이 맞당께요."

세상의 온갖 쓴맛 단맛을 다 본 탓인지 애양원 사람들은 포기도 빨랐다. 그를  멀리 떠나  보낸다는 것이 결코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간 그가 애양원에서 와서 자신들에게 베풀어 준 은혜를 생각하면 한시도 이를 지체할 일이 아니었다. 병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사람들이 손도 잡기 꺼려하는 자신들의 곪은 상처에다 아무 거리낌 없이 입을 대고 고름을 빨아낸 사람이 손양원이었다.

마침내 그들은 모두 한마음 한 뜻이 되어 그를 보내기로 했다. 그와 그의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기회라는 것은 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특사로는 그와 함께 서울 부흥회를 다녀 온 권집사가 정해졌다. <계속> /신용구 소설가·정신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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